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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대한학교체육회의 활동 및 사업

최종 수정일: 6월 28일

 1. ‘학교체육 참가 실시 요강’ 제언

     

앞서 제3장 '학교체육회의 재도약 배경'에서는 문교부가 대한체육회의 빈번한 대외경기대회 개최에 제동을 걸기 위해 시즌제 도입을 지시한 사건을 소개했다(조선일보, 1965.03.16.; 조선일보, 1965.03.19.). 이 대책은 1965년 3월에 발표되었으나, 대한체육회의 강력한 반발과 정치적 압력으로 보름 만에 철회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1966년, 학교체육회가 적극적으로 문교부에 건의한 ‘학교체육 참가 실시 요강’을 통해 다시 이슈화된다.

     

# 이종택 구술 5: 대한체육회하고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가 32개 있었거든요. 32개 경기단체의 경기대회를 1년에 7번, 8번 나오라 그런다, 그러면 소위 학업 결손을 어떻게 할 것이며, 애들의 전인적 인격 형성은 어떻게 하나, 도저히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경기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 참가에 제동을 건 거예요. 문교부 산하에 문예체육국장이 누구냐 하면 이철희라고 그 양반이 독립투사 이00의 아들인데, 순수하고 올바른 사람이에요. 그분이 협조해서 ‘학교체육 참가 실시 요강’이라는 것을 우리가 만들어서 건의하니까 오케이 받았단 말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1년에 전국규모 대회에는 7회 이상 출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에요. 전국체육대회 나가야지요. 학교체육회가 행사하는 것이 또 있죠. 경기단체가 하는 종별 선수권대회 있죠. 그러니까 7회 가지고는 모자란단 말이에요. 경기단체가 막 아우성을 치니까 대한체육회가 위기의식을 느낀 거예요. 그러니까 대한체육회가 이거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우리가 까딱하면 먹히겠다. 위기의식을 느꼈단 말이에요. 거기다가 자존심이 무지하게 상했죠.
     

<구술 5>에 따르면, 당시 학교체육회는 “빈번한 대회 개최가 학생들의 학업에 악영향을 미치고 전인적 인격 형성을 저해한다”라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에 학교체육회는 학생들의 학업과 체육 활동 간 균형을 재정립하고자 학생들의 대회출전을 제한하는 안을 문교부에 제언한다. 다만 구술 증언과 사건 사이의 40년 세월 차이를 고려하여 신문자료를 검토하였다. 1966년 3월 18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기사에는 “문교부가 ‘학교 운동 실시 요강’을 공표했고, 이 요강에는 “각급 학교는 문교부 장관과 각 시․도 교육감이 인정하는 대회에만 선수단을 출전시킬 수 있으며 그 출전 횟수도 동일 종목에 대해 연간 6회 이상의 출전을 금하고, 시험 기간 일주일 전에는 여하한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고 명시되어 있다(동아일보, 1966.03.18.). 이종택 선생의 진술에 약간의 오류는 있지만, 학교체육회가 운동부 경기대회 출전을 제한하는 요강을 문교부에 제안하였고, 정책으로 채택되어 실제 학교 현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e.g., 동아일보, 1966.03.18.). 이 사건은 학교체육회가 대한체육회의 경기대회에 공식적으로 제동을 건 의미있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위 구술에는 문교부 이철희 문예체육국장에 대한 진술도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1966년 2월 13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기사는 주목할 만 한데, 그는 “대한체육회만으로는 학교체육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체육회에 맡길 수밖에 없다”면서 “학교체육회는 대한체육회의 유사단체가 아니며 (이 단체의 독립적 운영이) 정부의 체육행정일원화 지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는 내용이다. 이 발언이 있기 며칠 전 대한체육회는 문교부에 체육 유사단체 난립을 문제 삼아 체육행정 일원화(단체통합)를 요청한 바 있었다(조선일보, 1966.02.01.). 즉, 체육회가 문교부에 유사단체 난립을 이유로 학교체육회의 흡수통합 추진을 요청하자, 문교부 국장이 직접 나서 대한체육회의 체육단체 통합 요청에 대한 당위성을 반박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철희와 같은 문교부 인사의 우호적인 태도와 정책적 지원은 학교체육회가 문교부로부터 정책적 지지를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원은 다음 절에서 설명할 ‘학도체육대회’를 비롯한 학교체육회의 다양한 사업 추진에 강력한 정치적 힘이 되었을 것이다.

     

2. 전국 학도체육대회의 개최

     

1) 학도체육대회의 조직

대한학교체육회의 주요 사업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국학도체육대회’였다. 학도체육대회의 기원은 학도 호국단이 1952년부터 각급 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체육대회였다(정찬모, 2024). 그러나 1960년 학도 호국단이 해체되면서 기존 대회는 사라졌고, 서울시 자체 운영의 중고등학교 학도체전이 운영되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학교체육회의 사무처가 꾸려지면서 1966년에 대한학교체육회가 기획한 전국학도체육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초, 중, 고등학교가 참가하는 전국 단위 종합경기대회였다.

     

# 이종택 구술 6: 학교체육회는 어떻게 사업을 했느냐. 캣치프레이즈가 있어요. 모든 대외경기는 정과체육의 연장이고 평가 기회일 뿐이다. 학교에서 벗어나 경기를 하면 “그것은 정과체육의 연장이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정과체육의 평가 기회란 말이에요. 그래야 그것이 학교체육의 정도(定道)라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학교체육은 전인교육의 수단이어야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경기 행사가 엘리트 스포츠에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 이것을 내 걸고 하는 우리(학교체육회)가, 하나의 모델 케이스로 대회를 하나 창설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학도체육대회에요.

     

<구술 6은> 학교체육회가 전국학도체육대회를 기획한 철학적 지향이 담겨있다. 체육은 전인적 교육을 위한 수단이며, 모든 대외경기는 학교 교육의 연장이자 교육 평가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들은 학도체육대회를 통해 대한체육회 중심의 대외 경기대회로 인해 훼손된 학교체육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했다. 그렇다면 1966년 1월에야 사무처를 마련한 대한학교체육회는 어떻게 단시간에 이와 같은 전국 규모의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을까? <구술 7>은 학도체육대회 개최를 위한 조직 구성이 어떻게 일사천리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고있다.

     

# 이종택 구술 7: 학도체전을 하는데, 경기단체가 없잖아. 대한체육회는 경기단체가 있는데...... 각 시도 교육청에서, 그때는 교육위원회라고 그랬어요. 교육위원회의 체육 장학관이 있어요. 또 어떤 곳에는 보건체육과장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을 각 시도의 조직 책임자로서 임명을 했어요. 그렇게 일을 진행하니 일사천리야. 그 양반들이 전라남도 학교체육회 전무이사가 되는 거예요. 또 경기도 장학관은 경기도 학교체육회의 전무이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오죽 잘 되겠어요. 그리고 지부장이 누구냐. 각 교육감을 딱 해버리면 되는 거예요...... 당시 얼마나 순수한 정열에 불탔냐면, 우리는 청소년들, 학도들을 위해서 순수하게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대회 노래도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인 노산 이은상 선생이 작사를 하고, 김동진 선생이 작곡을 한 노래가 있습니다. “아세아의 동방 푸른 푸른 하늘” 참 노래가 아주 좋아요. 그 노래를 작곡하고, 그 캐치프레이즈를 모토로 세워서 전국에서 나오고, 대한체육회 없이도 너무 잘했단 말이에요.

     

<구술 7>에 따르면, 학교체육회는 지방 교육 행정 시스템을 활용하여 전국 규모의 학도체전을 단시간에 기획할 수 있었다. 문교부 산하의 각 시도 교육청과 장학관, 교육감 같은 교육 권력을 동원하여 학도체전을 위한 효율적인 조직을 신속하게 구성한 것이다. 즉, 학교체육회는 문교부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이철희 문교부 문예체육국장의 진술을 실었던 신문보도에 따르면, 그는 “5월 학교체육회가 개최 예정인 학도체전 등 여러 행사에 문교부가 후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어(조선일보, 1966.02.13.),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림 1>은 위 구술 후반부 진술된 “학도체육의 노래”의 악보이다. 경기대회를 창설하면서 대회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은 학교체육회가 구상했던 학도체육대회가 단순한 경쟁을 목표로 한 대회가 아니라 교육의 연장선상이며, 문화행사로 구상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 전국학도체육대회의 출범과 그 짧은 여정

대한학교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전국학도체육대회는 1966년 5월 23일 효창운동장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전국에서 5천여 명의 초․중․고 학생이 참가했으며, 대통령 박정희가 개회식에 참석하여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종택 선생은 이 대회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성황을 이루었다"라고 평가하면서, 대한체육회는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진술하였다. “대한체육회가 눈을 버쩍 떴다고. 이거 안 되겠구나. 자기들 행사에는 안 나온다고 하지, 우리가 하는 거 보니까 아주 멋있게 하지. 그래서 이거 안 되겠구나 위기의식을 느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체육회와 당시 언론은 학도체전의 성공적 개최보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한체육회는 학교체육회의 비대 현상을 비판하며, 학교체육회가 전국의 교육청 네트워크를 활용한 것에 대해 “각 지방체육회가 시 ․ 도 교육감이 지부장으로 있는 학교체육회의 영향력 때문에 여러 가지 행정적 난점이 있을 뿐 아니라, 지방 체육에 할당된 예산마저 학교체육회 관련 행사에 할애되는 경향이 많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지방체육회가 학교체육회 지부와의 마찰로 행정체계 일원화가 위축될 수 있다”라는 우려를 피력했다(동아일보, 1966.10.05.). 이와 함께, 학도체전이 교육적 목표에서 벗어나 시도 간 경쟁에만 치우쳐 대한체육회의 경기대회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대회는 시도별 순위를 매기며 승부에 과열되었고, 심지어 부정 선수까지 참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조선일보, 1966.05.29.).

학교체육회와 대한체육회 간의 권력 다툼이 극심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 비판은 “신문 보도의 공정성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한 번의 대회 개최만으로 “학교체육회의 이상이 학도체육대회에 얼마나 반영될 수 있었을까, 학도체전에 대한 신문의 거친 비판이 다소 성급한 건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대한학교체육회는 학도체전을 통해 학교체육의 연장이자 연구 및 평가의 장이라는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지만, 경쟁적 대외 경기에 익숙했던 참가자들이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과도한 기대였을 것이다.

대한학교체육회 기획 아래 이루어진 학도체전은 1968년 학교체육회가 대한체육회에 흡수 통합되면서 2회 만에 마무리된다. 따라서 학교체육회가 학도체전을 통해 투영하고자 했던 도전을 실패로 평가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학도체육대회가 담고자 했던 체육의 이상은 그 진정한 가치를 평가받을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향후 학교체육회의 학도체전을 통한 도전은 역사의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재평되어야 할 것이다.

     

3. 대한학교체육회의 학문적 공헌과 스포츠과학화의 선도

     

학교체육회는 체육의 과학화와 학문화를 체계화하고자 노력했다. 아래의 <구술 8>은 대한학교체육회의 사업으로 수행된 ‘학생 신체 충실 지수’와 ‘학교체육’이란 잡지의 발행에 대한 진술이다.

     

# 이종택 구술 8: 학교체육회 사업으로서 교직자들의 우수 논문 연구하고 발표도 시키고 그랬어요. 문교부 장관상을 타면 점수가 2점이래요. 승진점수 2점을 준대요. 도 교육감 상은 1점이고. 그러니 악착같이 연구해서 논문을 냈어요...... 학교체육회에서 하는 사업 중에 ‘학생 신체 충실 지수’란 것이 있었어요. 이화여대 윤남식 선생이 중심이 돼서, 현장 연구자를 훈련 시켜 만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학생들이 체격도 왜소하고, 덩치도 조그맸다고. 학생 신체 발달 상황을 학교체육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덱스를 만들었다고. 그것이 전국적으로 굉장히 히트했어요. 또 학교체육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어요. 잡지를 3천 권을 발간했는데. 그 잡지의 주관을, 편집장을 내가 했어요. 그 잡지 3천 권을 찍으면 한 권도 남김없이 다 팔렸어요. 잘 나갔어요. 잡지 잘 팔리지, 신체 충실 지수 잘 되지, 학도체육대회는 박수 받지...... 그러니 누가 학교체육회를 나무랄 일이 있냐 말이야.

     

<구술 8>은 대한학교체육회가 학교체육의 정상화를 위한 현장 노력과 더불어 체육의 과학화와 학문화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위 구술에서 이종택 선생이 언급한 '학생 신체 충실 지수' 사업와 관련하여 1967년 조선일보는 비교적 자세하게 그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체력이 예상외로 불량하다는 사실이 최근 실시한 두 전문기관의 조사 결과에서 밝혀졌다. 그 하나는 학교체육의 정상화와 체육진흥 및 연구의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작년 9월5일부터 한 달 동안 전국각지의 60여 개 국민, 중, 고교 1만3백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대한학교체육회가 실시한 학생체력측정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 보건진료소가 금년도 동교 신입생을 상대로 실시한 건강진단이다. 전자의 경우 한국 학생의 체력실태를 일본 학생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① 신체형태, 체격에서는 일본의 학생보다 발육이 우세하나 신체기능, 체력은 그들에게 뒤떨어지는 현상이고 ② 한국 학생이 남녀를 막론하고 대체로 국민학교와 중학교 세대에 일본 학생보다 열세하다는 것이다(조선일보, 1967.03.28.).

     

학교체육회의 ‘학생 신체 충실 지수’ 사업은 한국 학생들의 체력과 신체 상태를 측정하고, 이를 일본 학생들과 비교하여 과학적으로 분석한 시도였다. 1960년대 중반에 과학적 지표를 만들고, 1만 3백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측정하여 국가 간 비교 연구까지 진행한 것은 한국 체육학계의 기념비적 성과라 할 수 있다. 한편, 대한학교체육회가 발간한 '학교체육'이라는 잡지는 체육 관련 학문 연구와 교직자들의 논문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발표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이 잡지는 체육교육 및 스포츠과학의 정보 제공과 학문적 대화 촉진에 기여했을 것이다.

     

출처: 한승백(2024). 체육원로 인종택 선생의 구술을 통해 본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의 이상과 도전 그리고 역동.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37(2),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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