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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대한학교체육회의 흡수통합과 그 이후

최종 수정일: 6월 28일

    1. 대한학교체육회의 흡수를 위한 정치개입과 전략

     

1966년 12월 24일 김포공항에서 열린 제5회 방콕아시안게임 선수단의 귀국 환영회에서, 손기정 단장은 삭발한 채로 등장하여 대한체육회와 KOC 사이의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KOC가 승인 없이 예산을 집행하고, 공식 석상에서 단장을 배제하는 등 선수단을 독단적으로 장악했다는 항의의 표현이었다(김미숙, 2020; 한태룡, 2017). '손기정 단장 삭발 사건'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단에 대한 권한을 누가 소유할 것인지에 대한 KOC와 대한체육회 간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사건이다(한승백, 2023). 이 사건은 1968년 체육단체 통합의 배경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렇다면 대한체육회와 KOC 간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체육회는 왜 통합의 대상이 되었을까? 앞서 이 연구에서 대한체육회가 학교체육회의 여러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꼈음을 기술한 바 있다. 이 절에서는 통합의 구체적인 과정을 함께 살펴본다.

     

# 이종택 구술 9: 대한체육회와 KOC가 문제가 생겼단 말이에요. 체육회랑 KOC는 알력(싸움)이 있으니 안 되겠다, 이걸 처리해야겠다. 그런데 학교체육회는 66년하고 67년, 이미 두 번이나 학도체육대회를 성공적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68년 대회를 준비 하고 있는데 통합이 되더라고. 사실 학교체육회는 너무 잘하고 있었죠. 조직도 확장되고, 너무 잘하니 대한체육회가 영역을 잠식당한다고 생각한 거죠. 대한체육회에 학교체육이 주축인데, 허리가 끊어져 버리니까...... 총 권력을 갖고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박정희 아닙니까. 그런 문제가 있는 걸 알고 거기에 동조를 한 것이 누구냐 하면 김종필이라고. 그걸 알고(사전에 체육단체 통합작업이 있다는 걸 알고) 김종필이 자기 형 김종익보고 “형님 학교체육회 내놓으세요” 그래서 내놨다고. 그래서 후임으로 들어간 게 누구냐 하면 윤천주란 분이에요. 문교부 장관 출신이고. 그런데 학도체전이 아주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있고, 교육감, 교육위원회 장학관, 장학사들이 죄다 자립, 결속이 돼서 잘 운영되고 있는데, 조직을 넘기라면 그냥 넘기겠어요. 더군다나 문교부 장관까지 지낸 윤천주 회장이 아무 소리도 못 하고 통합을 하게 된 이유는, 어마어마한 권력이 작용했다는 거예요. 그 권력이 박정희라고. 박정희 말 한마디에 쫙 내려오니까 쫙 죽어버리는 거예요. 게다가 윤장관이 김종필하고 가까운 사이였어요. (김종필이)총리 할 때 문교부 장관이었고, 아주 가까웠다고. 김종필 요청으로 김종익 회장이 물러나고, 윤천주 회장이 학교체육회 회장이 된 건, 저항하지 않을 사람을 회장에 앉히고, 그래서 학교체육회가 별다른 문제없이 통합하게 된 면이 있죠.

<구술 9>는 학교체육회가 대한체육회에 흡수 통합된 뒷배경을 설명하는 진술이다. 엘리트 스포츠 정책의 중요성을 절감하던 국가는 1966년 소위 ‘손기정 삭발 사건’ 이후 대한체육회 중심의 체육단체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학교체육회는 1966년 이후 학도체전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활발히 확장하고 있었고, 대외 경기는 학생의 전인적 교육의 일환이라는 뚜렷한 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8년 학교체육회와 대한체육회의 통합은 단순히 대통령 박정희의 명령 이행을 넘어, 좀 더 복잡한 전략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음을 <구술 9>를 통해 알 수 있다.

학교체육회는 1965년 사단법인 출범 당시 김종필의 형 김종익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치적 힘이 있는 인물을 내세워 학교체육회를 견제하던 대한체육회에 맞서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었다. 그런데 위 진술에 따르면, 학교체육회를 대한체육회에 통합시키기 위해 김종익을 회장직에서 내리고, 윤천주가 회장이 된 배경이 설명된다. 대통령의 박정희의 영향력 아래, 김종필을 통해 대한학교체육회의 리더십이 교체되었고, 그 결과 통합이 상대적으로 잡음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2. 1968년 체육단체 통합과 학교체육회의 전략적 대응

     

1968년이 시작되자 체육단체 통합이 급물살을 탄다. 이 시점에서 대한체육회, KOC, 그리고 학교체육회는 일단 해산하고, 단체별로 3명씩, 9인의 통합위원회를 결성하며, 이 위원회에 통합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게 된다(조선일보.1968.01.26.). 통합은 1968년 초 급박하게 진행된 것 같지만, 아래의 <구술 10>에 따르면 1966년 6월 30일 대한체육회의 무교동 사옥이 생기기 이전부터 통합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윤천주 회장 취임(1967년 10월 12일) 이후, 빠르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종택 구술 10: 이분(윤천주)이 회장이 되면서 학교체육회로 따라온 분이 있어요. 신동일이란 분인데, 이분들은(윤천주와 신동일) 학교체육회가 없어질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대한체육회에 유리한 조건으로 넘겨주느냐, 이 작업을 했어요...... 통합은 시키되 희한한 정관을 만들었어요. 정관에서 위원회를 만드는데, 위원회가 세 개예요. ‘학교체육위원회’, ‘사회체육위원회’, ‘경기력향상위원회’, 이 세 개의 위원회를 만들었어요. 학교체육위원회 위원장은 국민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의 분과위원회 위원을 임명해서 거기서 분과위원장을 선출하고, 그 통합위원회에서 학교체육위원회 위원장을 선출하면 대한체육회는 학교체육위원회 위원장을 제1 수석 부회장으로 앉힌다. 그러니 학교체육회로서는 자존심이 크게 훼손이 안 되는 거죠. 두 번째, 학교체육위원회는 이사회의 1/5 이상을 학교 교육자로서 임명한다. 학교체육위원회는 자문위원회가 아니라 실권위원회예요. 학교체육위원회에 관한 한 이사회의 간섭 없이 자체 심의를 하고 자체 결의를 해서 집행한다는 것으로 해 놨다고요...... 그러니까 (통합)작업이 진행되더라고. 자꾸 대책위원회가 열리고, 준비위원회가 열리고, 그때 대한체육회가 어디에 있었냐 하면 지금 플라자 호텔, 일제시대 봉황면옥이라고 하는 일본 가옥의 집이 있었는데, 들어가면 바닥에 삐꺽 삐꺽하는 소리가 나는 낡은 건물이었어요. 거기를 왔다 갔다 하더니 1966년 6월 30일, 대한체육회 무교동 사옥이 생겼단 말이에요. 대한체육회에서 회의하면 김종열 대한체육회 회장, 그 당시에는 전무이사로 있었거든요. 그분이 실무책임자가 되고, 대한체육회에 김종모라고 서울대 정치과 나온 분이 사무차장이에요. 머리가 참 비상한 분이에요. 회의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까 68년이 되더라고. 구체적으로 진행되더라고. 그러면서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학교체육회는 1968년 2월 8일 대의원 총회를 갖고, 집행부가 사퇴하고, 사단법인 해산을 결정한다(조선일보, 1968.02.09.). 마지막 이사회에서는 학교체육회를 대표해 통합체육회의 9인 전권위원회에 참여할 3인 전권위원으로 윤천주 회장, 김명복 부회장, 신동일 전무이사를 선출한다(조선일보, 1968.02.08.). 그리고 단체통합이 기정사실로 된 상황에서 학교체육회는 대한체육회 내,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기존의 학교체육 사업을 계속 이어갈 방안을 모색한다. 윤천주 회장과 신동일 전무이사가 주도한 이 작업은 통합 대한체육회 내, 학교체육회의 명맥을 유지할 중요한 몇 가지 대책을 포함한다. 대한체육회 내 주요 세 개의 중요한 위원회 중 하나로 '학교체육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각각의 위원회가 전문성을 갖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구조화하였다. 또한 제1 수석부회장을 학교체육위원회 몫으로 임명하도록 하고, 학교체육위원회의 1/5을 교직계로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실권위원회로서 학교체육에 관한 한 이사회의 간섭 없이 자체 의결 집행한다는 것을 정관에 명시하였다. 이 같은 대책은 학교체육회가 자체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일정 정도 보존하면서도 통합된 대한체육회의 일부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구술 10>에서 이종택 선생은 3개의 위원회를 학교체육위원회, 사회체육위원회, 그리고 경기력향상위원회로 기억했지만, 이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의 신문 기록은 경기력향상위원회 대신 ‘올림픽위원회’라고 보도하고 있어, 이름을 잘못 기억한 것인지, 아니면 두 개의 별도 위원회가 따로 존재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조선일보, 1968.01.27.).

     

3. 통합 이후 대한학교체육위원회

     

1968년 단체통합 당시 대한체육회는 7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70명에는 KOC와 학교체육회에서 흡수한 인원도 같이 포함되었는데, 그 비율을 보면 기존 대한체육회 인원이 46명, KOC와 학교체육회가 각각 12명으로 구성되었다(조선일보, 1968.03.12.). 이종택 선생은 학교체육회에서 대한체육회로 직을 옮긴 12명 가운데 한 명이었고, 그는 대한체육회로 직을 옮기며 공보과장을 맡는다. <구술 11>은 통합 이후의 대한체육회 내 대한학교체육위원회에 관한 기록이다.

     

# 이종택 구술 11: 71년까지는 잘 유지가 됐어요. 민관식 회장이 (통합 당시) 공약을 했고 또 정관이 있으니까, 잘해 나갔어요. 그런데 71년도 말에 김택수씨가 회장이 돼요. 이분은 “이게 뭐꼬? 학교체육회가 뭐꼬? 치와 버려라! 사회체육위원회가 뭐꼬? 치와 버려라!” 그 기능을 완전히 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한체육회가 학교체육위원회 임원회를 소집을 안 해요....... 그렇게 점점 가더니, “교직자가 1/5 이상이 반드시 이사진에 들어와야 한다”는 정관도 없애버려요. 대한학교체육회의 흔적이 대한체육회의 정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더라고. 그리고 KOC도 그냥 유명무실 되더라고. 이 양반이 자기 방에다가 사자성어 ‘고진감래(苦盡甘來)’ 아시지? 이걸 ‘고진득금(苦盡得金)’으로 써 붙였어요. 고생을 다 하고 고통이 다 끝나면 금메달이 온다. 금메달을 따야겠다. 왜냐하면 72년 뮌헨올림픽 때 내가 총무로 갔는데, 그때 유도에서 오승립이라는 선수가 은메달 하나 딴 거밖에 없었다고. 얼굴이 찡그려지더라고......“선 체력 후 기술” 이걸 써서 선수촌에 떡 부쳤어요. 체력 위에다가 기술을 얹어야 한다. 이거 안 하곤 안되다 그래서 불암산 꼭대기까지 구보시키고, 그 외에 나머지는 안 하는 거예요. 스포츠과학위원회? 무슨? 뭐 필요 하나? 없애버려라!     

<구술 11>은 단체통합 이후 학교체육위원회가 대한체육회 내에서 그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고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민관식 회장 재임 기간에는 대한체육회 내, 학교체육위원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정관과 공약이 학교체육회의 독립적 역할과 기능을 어느 정도 보장했다. 그러나 민관식 회장의 임기 후, 71년 말 선출된 김택수 회장 시기에 상황은 급변한다. 위 구술에 따르면 회장 김택수가 기존 정관에 명시된 위원회 기능을 무시하고, 학교체육위원회를 포함한 여러 위원회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했다는 것이다. 김택수는 기존의 위원회의 독립적 기능을 존중하던 포괄적인 위원회 구조에서 벗어나 경기력 향상 및 국가대표 중심의 승리 지상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계기는 다름 아닌 72년 뮌헨올림픽의 실패였다.

이 연구에서는 김택수 회장의 행보에 대한 구술자의 기억이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교차 검증하고자 하였다. 모든 정황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김택수 회장이 72년 뮌헨올림픽 직후 가진 기자회견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한국 스포츠는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경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현행 스포츠 체계를 정비하고 새 체제를 확립해야 할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고 선언했다(경향신문, 1972.10.04.).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를 따오지 못한 것은 올림픽에 참가하는 임원, 선수들만의 책임이 아니고 온 국민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말하고, “현재의 국제 스포츠 경쟁에서 메달 획득 여부는 국력이 뒷받침하는 결과로 나타난다”고 강조했다(경향신문, 1972.10.04.). 국제 스포츠 경쟁은 곧 국력의 상징이며, 국가대표 경기력 향상에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야 함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진술은 김택수 회장 시기 대한체육회의 기조가 본격적인 국가대표 중심의 국가주의 엘리트 스포츠 육성 패러다임으로의 전환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구술 11>의 또 한 가지 의의는 1972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1972년은 유신독재가 시작된 해이며, 체육 분야에서는 체육특기자 제도를 도입하여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교 및 대학까지 연계적인 엘리트 선수 육성 체계를 완성하였고, 승리지상주의의 스포츠 패러다임이 완성된 해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1972년 체육특기자 기원설은 과거 문서의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명백한 오류이며, 체육특기자 제도는 그 이전부터 입학전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이미 실행 중이었다(한승백, 탁민혁, 2017). 이종택 선생의 <구술 11>은 1972년도의 승리지상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국가주의 스포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의 계기로 유신이 아닌 뮌헨올림픽 실패를, 그리고 이를 주도한 행위자로 김택수 회장을 지목한다. 물론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유신 선포와 함께 국가주의 스포츠 패러다임 하에 스포츠를 도구로 활용했다는 가정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종택 선생의 구술은 좀 더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국가주의 스포츠로의 패러다임 전환의 역동 속에 체육회 내 학교체육위원회로 명맥을 유지하던 대한학교체육회의 기능은 점차 소멸되었다.


출처: 한승백(2024). 체육원로 인종택 선생의 구술을 통해 본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의 이상과 도전 그리고 역동.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37(2),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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