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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공간 테니스장의 소멸

1789년 6월 20일 프랑스, 평민을 대표하는 제 3신분의 국민의회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 건물에 모여 프랑스에 새로운 헌법이 생길 때까지 연대하고 저항할 것을 약속했다. 테니스코트의 서약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었고, 테니스장은 근대 민주주의가 촉발된 장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테니스장에 대한 장소성으로 민주주의 혹은 자유, 평등, 박애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르디외는 그의 저작 구별짓기에서 테니스가 클럽과 같은 사적인 전용장소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시간에 정해진 파트너와 비교적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스포츠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복장, 매너, 페어플레이, 스포츠맨십 정신과 같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테니스를 전형적인 상류계급 또는 지배적 취향의 스포츠로 분류하였다(Bourdieu, 1979). 그의 기준에 따르면 테니스장은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그들만의 정보를 교환하고 사교를 즐기는 폐쇄적인 장소이다. 그곳은 은폐된 입장권이 필요한 계급적 아비투스의 공간인 것이다.


70~80년대 한국의 테니스장도 상류사회의 공간적 특성을 나타내었다. 당시에는 많지 않았던 테니스장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은 제한적이고 특별한 지위의 사람들이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테니스라켓 하나들고 공항에 가면 '무사통과'란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고급 수입 테니스라켓의 가격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시절의 테니스를 소비하는 것은 곧 상류계층이란 상징적 의미와 연결되었다. 테니스장은 부르디외의 설명대로 상류계층의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90년대 변화가 일어났다. 테니스를 좋아했던 대통령 노태우가 1,000가구 이상 아파트 단지를 건설할 시에는 테니스코트 1~2면을 짓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강제적 건설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 있었을 법도한데 당시 이 정책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중간계급 사람들에게 상류계층의 스포츠이자 고급 스포츠의 이미지를 갖춘 테니스장이 단지 내 들어서는 것은 주거공간의 품격을 한결 높이는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교양체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테니스를 소개했고, 테니스는 사회진출을 앞둔 교양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취향이 되었다. 대중은 테니스의 향유를 통해 상류계층으로의 진입을 꿈꿨고, 때마침 부도를 맞은 국내 라켓제조업체들이 싼 가격의 제품을 내 놓은 것도 테니스가 점차 중산층으로 확대되는데 일조하였다.


세월이지나 자본주의적 질서가 더욱 공고해진 지금 도시의 테니스장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아니 도시 공간 속 테니스장은 이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의 테니스장들은 보다 높은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변경되어가고 있다. 자본의 효율적 재생산 이란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규칙을 고려해보면 도심 한 가운데 소수의 인원만이 즐길 수 있는 테니스장은 결코 효율적인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위치에 건물을 짓고 상업시설을 유치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일이다. 대학교 내에 건물을 신축하거나 주차장을 설치할 때 테니스장이 철거의 우선적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차라리 테니스가 대중화된 스포츠가 아니라 여전히 제한된 상류계층의 소수가 폐쇄적으로 즐기는 스포츠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아파트 단지 내 위치한 테니스장과 함께 보다 품격있는 주거환경을 상상했던 거주민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테니스장은 시도 때도 없이 소음을 만들어내고, 철망으로 둘러싸인 외관은 고급스런 단지 내 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흉물로 전락하였다. 밤마다 몇몇 동호인들이 모여 켜 놓는 조명등은 수면권을 주장하는 입주민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서도 여전히 동호인 위주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운영된다는 운영 방식도 비판을 받았다. 주차장과 같은 다른 시설로 용도변경을 원하는 주민들과 동호인들 간에 갈등이 극에 달하자 전국은 한때 테니스장 용도변경을 둘러싼 소송이 줄을 잇기도 했다. 대중화로 인한 테니스의 차별성 소멸은 아파트 단지 내 테니스장의 입지를 오히려 위축시켰다.


한국사회의 테니스장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그 공간의 의미와 가치가 변천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사실은 테니스의 대중화가 공간의 확대가 아닌 축소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 스포츠 공간으로서 테니스장의 운명은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5월 18일

한국스포츠사회학회 특별세미나

경남대학교 본관 4층 대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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