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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장벽을 깬 마라톤화 그리고 기술 도핑 논쟁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9일




지난 2019년 10월 케냐의 마라토너 킵초게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마라톤 2시간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공식 대회는 아니었다. 기록 달성을 위한 이벤트 대회였다. 날씨, 코스, 장비 등 모든 조건을 기록 달성을 위해 최적화시켰고, 킵초게와 함께 41명의 페이스메이커가 번갈아 뛰며 레이스를 도왔다. 대회 직후 시선은 킵초게가 신고 뛴 나이키 사의 마라톤화 ‘베이퍼플라이’에 쏠렸다. 이 기록이 과연 인간 노력에 의한 성취인지 아니면 장비 덕택인지 궁금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나이키 사의 마라톤화가 처음 논란이 된 건 지난 2016년 리우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메달을 획득한 킵초게를 비롯해 모든 메달리스트가 베이퍼플라이의 전신 격인 브레이킹2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마라톤화를 착용했다. 이 마라톤화를 분석한 연구들은 “탄소섬유 바닥재가 용수철 역할을 한다.”, “평지보다 1~1.5% 경사진 내리막길을 뛰는 효과를 낸다”와 같은 결과를 쏟아냈다. 그리고 킵초게가 2시간의 장벽을 무너뜨리자 세계육상연맹(World Athletics, 구 IAAF)은 베이퍼플라이의 ‘기술 도핑(technology doping)’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한다. 이 문제에 대해 세계육상연맹은 “특정 선수만을 위한 신발은 공식 대회에서 사용할 수 없다. 모두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어야 한다. 신발 밑창의 두께는 40㎜ 이하여야 한다. 탄소섬유판은 1장만 허용한다"란 결론을 내렸다. 세계육상연맹은 이렇게 공정성을 위한 기준을 세움으로써 논란을 잠재웠지만, ‘특정 선수만을 위한 신발 금지’를 언급했을 뿐 베이퍼플라이가 기술 도핑인지 아닌지에 대한 즉답은 피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판결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술 도핑이란 스포츠에 사용되는 장비가 ‘인간 신체의 탁월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불공정한 이익을 제공할 경우를 의미한다. 이전에는 주로 약물복용과 같은 생물학적 조치 등과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첨단 소재가 적용된 스포츠 장비들 역시 약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기술 도핑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스포츠에서의 장비가 기술 도핑인지 아닌지 그 경계를 규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외부적인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장대높이뛰기의 유리섬유 폴과 수영의 폴리우레탄 전신수영복의 예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특수유리섬유 소재의 장대를 사용한다. 그 이전에는 대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무나 알루미늄 같은 금속 소재 폴을 사용하였다. 이들 장대는 탄력성이 없었기 때문에 장대를 세운 다음 최고점을 향해 타고 오르는 것이 주요 기술이었다. 그러나 유리섬유 폴이 등장하자 활처럼 휘어졌다 펴지는 강한 탄성을 활용하기 위해 전혀 다른 공중 동작이 필요했다. 유리섬유 폴의 등장은 ‘속임수’, ‘서커스’란 비판과 함께 공정성 시비를 낳았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알루미늄 장대를 이용해 금메달을 땄던 돈 브래그는 “유리섬유 폴을 사용하는 건 인간의 순수능력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며 은퇴해 버렸다. 하지만 협회는 유리섬유 폴을 받아들인다. 유리섬유 폴 덕택에 더 높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펼치는 멋진 퍼포먼스를 볼 수 있었고,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신기록도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50년부터 100년 동안 수립된 세계 신기록이 51개에 불과했던데 반해, 유리섬유 폴의 등장 이후 1960년대 10년 동안 52개의 세계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대중에게 멋진 퍼포먼스와 기록경신의 즐거움을 선사한 유리섬유 폴은 자연스럽게 종목의 한 부분으로 수용되었고, 장대높이뛰기 종목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와 반대되는 사례로 폴리우레탄 전신수영복이 있다. 이 수영복은 근육을 압박하고 마찰을 줄임으로써 항력을 낮추는 원리로 개발되었다. 인위적인 부력을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규정상 문제는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 신소재 수영복이 지나치게 많은 성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스피도사의 레이저 레이서를 착용하고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리우올림픽 38개 세계 신기록을 비롯해 108개의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였다. 이듬해인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 때는 단일 대회 최다인 43개의 세계 신기록이 쏟아졌다. 신기록 대잔치는 역사상 최고란 희소성의 의미를 절하시켰다. 또한, 스포츠 용품 시장에서 특정 업체의 기술 독주는 경쟁업체들의 반발을 샀다. 사실 기술 도핑이란 용어는 이때 처음 등장하였다. 2008년 아레나 사는 레이저 레이서의 퇴출을 요구하며 ‘기술 도핑’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도핑이 갖는 비윤리적 의미를 부각해 스피도 사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다른 업체와 계약관계에 있는 선수들도 반발했다. 마이클 펠프스는 “첨단 수영복이 금지될 때까지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세계수영연맹이 수영복 재질을 직물로 한정하면서 폴리우레탄 전신 수영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스포츠용품 시장의 이해관계가 또 하나의 기술혁신이 될 수 있었던 폴리우레탄 수영복을 퇴출해버린 것이다.


인간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기대이자 근대스포츠가 추구해온 정체성이다. 누군가 월등한 장비의 성능 때문에 승리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스포츠의 의미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신소재 첨단장비가 도입될 때면 견고한 과학의 그물망으로 기술 도핑 여부를 판가름하길 기대한다. 그러나 기술 도핑 논쟁에는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그 경계에 대한 설정은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첨단 신소재로 인해 생겨나는 스포츠 공정성의 새로운 기준들은 경기를 관장하는 협회, 용품업체, 후원을 받는 선수들의 이해관계, 흥행, 대중의 인정 등 수많은 힘의 방정식이 만들어내는 산물인 것이다.


출처: 서울스포츠 2020년 3월호 스포츠 잡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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