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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나이키 그리고 지구 자본주의

며칠 전 박연차 회장이 별세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이자 박연차 게이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태광실업 회장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오디오 태광 에로이카를 생각했었지만, 그는 신발산업 종사자였고, 나이키 신발을 만들어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의 재산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데, 작년 기준 1조 916억 원, 한국 부자 38위다.

박연차의 태광실업은 1980년부터 나이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60년대 나이키가 처음 ‘블루리본 스포츠'란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했을 때, 세계 신발 시장의 패권은 아디다스랑 푸마가 양분하고 있었다. 필 나이트도 아디다스 같은 모델을 동경했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낮은 단가로 신발을 생산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신발도 잘 만들고, 생산 단가도 낮출 수 있는 회사를 찾자 ~ 그래서 찾은 게 타이거 사다. 그렇다. 그 아식스 타이거. 일본의 아식스가 나이키의 첫 OEM 업체였다. 그래서 이렇게 똑같은 신발을 상표만 다르게 붙여 팔았다.


나이키랑 아식스는 78년 결별했다. 이유는 생산 단가가 높아져서다. 한국은 일본 다음에 나이키가 파트너로 삼은 나라였다. 필 나이트가 쓴 슈독에 보면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짝퉁 상품 때문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이키 짝퉁을 만들어 파는 한국 내 신발 업체를 고소하려다 품질이 좋아 차라리 한국에서 생산하자고 맘먹었다고.


그렇게 한국으로 시선을 돌린 나이키가 손을 잡은 업체가 ‘화승’이었다. 맞다 그 고무신부터 만들었다는, 기차표 신발을 생산하던, 왕자표와 함께 한국 신발산업의 양대 산맥 화승이 나이키의 첫 파트너였다. 박연차의 태광실업은 화승이 나이키의 수주를 받아 재하청을 준 업체였다. 그런데 화승과 나이키의 파트너십은 86년 끝이 난다. 이유는 나이키가 높은 로열티에 터무니없이 낮은 수출단가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승은 차라리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미 국제상사가 프로스펙스를 만들어 탑을 찍는 모습을 봤는데 뭐 하러 막대한 로열티까지 주면서 나이키를 만들고 있나.



80년대 중반 경남을 거점으로 한 신발산업이 엄청난 호황을 이뤘던 시절이다. 전 세계 나이키의 70%를 만드는데 독립선언 못할 이유 뭣이겠나. 스포츠 브랜드 붐이 일었지만 마이클 조던 이전의 나이키는 원 오브 뎀이었지 지금 같이 굳건한 넘버원은 아니었던 시절이다. 게다가 80년대에는 국내 상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는 마당에 스포츠용품이라고 구태여 외제를 쓸 필요 있나.”“어차피 나이키도 다 한국에서 만든다는데.” “우리야말로 스포츠용품 업계의 선진국 아닌가.” 국풍 81, 민속 씨름의 인기,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프로스펙스의 열풍, 소위 전두환 표 캔 두 스피릿의 외양은 화려했다.



나이키와 결별한 화승은 자체 상표 르까프를 출시했다. 본사만 바뀐 게 아니라 나이키 대리점이 죄다 르까프 대리점으로 바뀌었다. 우리 동네에서 올모스트 제일 이뻤던 쥬리네 집도 나이키에서 르까프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후 나이키는 삼양통상이랑 ‘한국 나이키’를 설립한다. 이 대목에서 박연차의 태광실업도 일대 도약의 기회를 맡는다. 나이키가 화승의 재하청 업체였던 태광과 직접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게 86년도의 일이다.

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나이키는 더 싼값에 신발을 만들 수 있는 생산지를 찾아 동남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한국의 노동자들도 과거 일본 노동자들처럼 더 높은 임금과 더 좋은 노동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냥 더 싸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았을 뿐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새롭게 나이키의 파트너가 된 나라들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그리고 중국이다. 88년 기준 한국의 나이키 신발 생산은 4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문제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과 똑같이 공장도 짓고, 생산 시스템도 갖추었는데 품질도 떨어지고, 불량품도 많고, 전체적인 생산성도 안 나왔다는 거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무엇이 다를까. 고민에 빠졌던 나이키가 찾아낸 해답이 바로 한국의 작업반장 소위 ‘십장 시스템’이다.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작업을 지시하는, 달리 말해 노동자를 통제하고, 다그치고, 조지면서 생산성을 뽑아내는 생산라인의 군기반장. 그 십장이 동남아에 설립된 나이키 공장에는 없더라는 거다. 그래서 나이키는 한국의 십장들을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스카우트한다. 생산지를 동남아로 옮겼지만 한국 기업들이 계속해서 나이키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박연차의 태광도 그렇게 94년도에 베트남 현지 공장을 설립한다.

한국인 십장 시스템을 도입했던 동남아시아의 나이키 생산공장들은 유럽과 북미의 인권단체들로부터 스웻샵(sweat shop)이란 비판을 받는다. 나이키의 축구공과 스포츠화가 아시아의 노동착취 공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거였다. 가령 나이키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 노동자는 시간당 15센트를 받았다. 그렇게 하루 11시간을 일해 만들어진 생산원가가 6-7달러에 불과한 나이키 신발은 유럽과 북미에서 70달러에 팔려 나갔다. 아이 빌리브 아캔 플라이와 함께 날아올랐던 마이클 조던에게 지불하는 인돌스 먼트 피는 인도네시아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당시 안티 스웻샵 운동에 나이키가 내놓았던 답변 중 하나가 이거다. “우리는 하청을 줬을 뿐이다. 아시아의 생산공장은 누구의 것인가. 다 한국인들 것 아닌가.”였다. 여기에 한국인 십장들이 노동자들을 구타했다는 보도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나이키 스웻샵 문제의 중심에 한국 기업들이 위치하게 된다.

박연차의 태광 나이키 공장은 어땠을까. 그들도 여느 나이키 스웻샵처럼 노동 착취의 현장이었을까. 국제노동기구 ILO가 발간한 Food at work란 책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태광 비나는 많은 노동법규 위반으로 지역 노동자들과 노동 감시 단체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쁘다. 주요 문제들은 노동자를 병들게 하는 산업용 용제, 환경 위반, 불법 시간 외 노동 및 채용, 낮은 임금, 언어 및 신체적 학대 등이다. Wanjek, C. (2005). Food at work: Workplace solutions for malnutrition, obesity and chronic diseases.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미국 방송국 ESPN이 나이키 스웻샵 취재를 위해 베트남 태광 공장을 찾았을 때, 기습 방문도 아니고 미리 다 알리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인 여성 작업반장이 인도네시아 여성 노동자를 두 차례나 때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엄청난 분노가 일기도 했다(https://www.saigon.com/nike/espn.html). 마치 군대 훈련소처럼 노동자에게 창피를 주고, 무릎을 꿇게 하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세워 놓는 것, 이게 한국 십장들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들이다.


나이키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기며 더 싸게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동남아로 더더 생산 단가를 낮추는 방법을 찾았다. 나이키의 인도네시아 베트남 공장들은 한국의 십장 시스템에 세계 최저 임금을 접목한 생산라인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기업들은 나이키의 스웻샵의 최전방에서 노동자를 규율하고, 억압하고, 탄압했다. 오늘날 나이키가 전지구적 자본 축적 구조를 완성하는데 가장 더러운 손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신발 제조 업체들의 세계시장에서의 업적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국 기업과 나이키 스웻샵 문제를 연결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이키 스웻샵에 80년대 한국 신발공장에서 이루어졌던 노동착취라는 선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외면한다.


나는 훗날 벌어진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가 하청업체로서 40년 이상 이어온 그의 사업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청업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로비가 그의 사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나이키가 국경을 가로질러 생산기지를 확대했던 것처럼 박연차의 로비도 여야, 정관계, 한국, 베트남을 가로질러 거침이 없었다.


박연차는 노무현의 후원자였을 뿐 아니라 김영삼 때 산업훈장을 받았고, 김대중 때 한나라당 재정위원을 역임했고, 2003년에는 베트남 정부로부터 '베트남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한국인'으로 뽑혀 훈장을 받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도, 베트남 현지에 7만 명을 고용하고 연간 1조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그가 베트남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말할 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입체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박연차의 삶에 한국 운동화 산업의 계보, 나이키의 지구화 그리고 전지구적 차원의 노동 착취 시스템 구축이란 복합적인 맥락이 담겨 있다. 나이키와 박연차가 90년대 스웻샵을 통해 합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착취에 기반한 거대 자본을 축적하지 다면, 오늘날과 같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이키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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