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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성 레저시설로 찍혔던 테니스장


70년대 초반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한 사설 테니스장들 가운데 일부는 휴게실과 라커룸 등이 갖추어진 클럽하우스와 나이트, 주차장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회원제라는 경영방식을 통해 특정 계층을 위한 차별적 공간을 제공하였다. 성북구에 있었던 남경 테니스클럽의 경우 72년 개인회원이 약 10만원의 보증금을 내고 별도로 코트 사용료 6백 원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는 택시 기본요금이 90원, 자장면 값이 30원이었던 시절이란 점을 감안하면 당시 회원제 테니스장은 일반적인 대중의 접근이 쉽지 않은 구별짓기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 초 테니스코트 1면을 만드는데 땅 값을 제외하고라도 평균 1백여 만 원, 야간조명의 경우 3백여 만 원의 많은 시설비가 들었기 때문에, 사설 코트들이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 회원제 운영을 선호하였고, 회원들은 사설 테니스장을 통해 고급 여가문화를 향유하였다. 반면 1인당 한 시간에 200~300원이었던 장충코트나 효창운동장 코트 등 저렴한 공공 테니스코트들은 1주일 전에도 예약이 쉽지 않을 만큼 초만원을 이뤘다(김의진 및 김원종과의 인터뷰 재구성, 경향신문. 1973.08.23).


테니스 붐이 한창이었던 가운데 1973년 10월 제1차 유류파동(oil shock)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전 세계의 경제 위기와 혼란을 초래했고, 한국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위한 대책마련에 들어갔고, 실내풀장, 옥내골프장, 롤러스케이트장, 테니스장 등을 ‘사치성 레저 시설’로 규정하였다. 실내풀장의 경우 전면 영업정지의 조치가 취해졌고, 테니스장의 경우 야간조명시설의 사용을 일체 금지시켰다. 당시 서울의 사설 테니스장 가운데 18개소 69면에 나이트시설이 되어있었는데, 한 신문보도를 통해 유류파동이후 라이트 시설을 갖추고 영업 중이던 테니스장시설의 에너지 소비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우려를 엿볼 수 있다.

서울시내의 영업용 테니스코트는 81개소 4백37면, 이중 18개소 69면에 나이트시설이 되어있다. 코트 1면의 나이트에는 4백W, 5백W, 7백W 1kw 등 4종류의 등 20개가 설치되어있어, 1시간에 12.3kw의 전력이 소모되고 있는 셈. 이에 따라 69면의 코트에서 전들을 켜는 경우 1시간에 8백37.7kw의 전력이 소비되는 것. 이 전기량은 30w짜리 가정용 등 2만7천9백23등에 해당하는 것(경향신문, 1973. 11. 27).

사설 테니스장에 대한 라이트시설 사용 금지 조치는 당시 테니스의 고급화, 사치화 경향에 대해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던 비판적 시각과도 맥을 같이 한다. 다음은 1974년 동아일보 ‘오피니언’란에 실린 한 시민의 의견인데 이를 통해 당시 테니스의 고급화, 사치화 경향에 대한 우려를 찾아 볼 수 있다.

테니스가 너무 고급화되고 사치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사설 테니스코트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설 테니스코트에는 훌륭한 시설에다 휴게실, 주차장 시설, 심지어 야간조명등 시설마저 설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들의 정신자세에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으레 훌륭한 테니스 복 테니스 화에다 외제 라켓, 외제 공을 들고 자랑스럽게 활보하고 다닙니다(동아일보, 1974.06.17).

값비싼 수입 테니스 라켓, 회원제 운영, 호화로운 클럽하우스, 라이트시설 등, 당시 대중의 인식에 새겨진 테니스의 이미지는 대중 스포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70년대 초반 1만 5천원~3만 원 정도에 거래되던 수입 라켓은 점차 고가의 제품을 선호하던 경향이 높아지면서 75년을 넘어서자 시장에는 7~8만 원의 고가 제품까지 등장을 하였다. 높은 관세를 피하고자 외국에 나갔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으레 테니스 라켓을 가져오는 경우도 늘어났다. 테니스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테니스의 고급화되고 차별적인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 그들의 위상을 구별 지으려 했다. 그러나 71년부터 전개된 국산품 애용운동이 대중의 가치관 속에 새겨진 상황에서 테니스의 사치화 경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테니스는 하나의 고급문화로서 안정적인 정착을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를 통해 분석했던 테니스를 포함한 프랑스의 여러 고급문화들이 상류계층의 삶 속에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던 반면, 70년대 테니스 소비를 주도했던 도시 중산층의 사람들은 짧은 기간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과시적 여가소비가 누구나 흠모하고 존경하는 문화로 수용되지 못했다. 당시의 사설 테니스장에서 이루어지는 호화로운 테니스소비는 선망의 대상이자 곧 질투와 질타의 대상이었다.


70년대 초 사설테니스장의 건설 붐은 당시 서울 도심에 등장한 사설 테니스장들은 도시중산층의 등장 수요에 대한 공급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테니스 붐이 테니스 대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대중화 이전 단계로서 여전히 테니스의 향유는 상류계층의 과시적인 소비의 형태 그리고 상류계층의 소비문화를 동경, 또는 모방하고자 하는 일반 대중의 모방효과(bandwagon effect)가 교차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한승백. (2013). 도시 공간 테니스장의 사회적 생산과 소멸에 관한 연구: 사설 및 아파트 테니스장을 중심으로.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26(1), 12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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