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공간에 대한 추억: 동대문운동장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15일
역사의 공간은 집단적 기억을 남긴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아직까지 동대문야구장을 추억한다. 그곳은 산업화 시대 사회적 이동의 열풍 속에 도시로 몰려든 지역의 사람들이 고향의 고교 야구팀을 응원하고, 학원스포츠의 순수함과 열정에 열광하며, 자긍심과 향수를 느꼈던 추억의 스포츠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동대문운동장은 1925년 10월 15일 일제가 경성운동장이란 이름으로 지은 근대 초기의 건축물이다. 건축 당시 이곳은 일본의 고시엔 다음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이곳에서 식민지 조선의 가장 큰 체육행사였던 ‘연보전’(연희전문-보성전문)과 경평축구가 열렸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1926년)가 지내졌다. 비록 일제가 자신들의 왕자의 결혼을 기념해 건립했다지만 일제강점기 동대문운동장은 스포츠를 통해 식민국 일본과 경쟁하고, 나라 잃은 울분과 회한을 달래던 민족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꾼 해방 후에는 찬탁과 반탁 집회가 열렸던 대표적 군중집회 장소였고,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박스컵을 비롯한 수많은 축구 경기가 열렸고, 4대 메이저 대회라 불렸던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가 개최되며 고교야구의 성지로 불렸다. 전국민의 관심을 받고 활활 타올랐던 고교야구 황금기의 추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추억거리이다. 80년대에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개막식이 열리기도 했지만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에 맞게 기능도 크게 축소됐다.
그래도 철거 이전까지 동대문운동장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여전히 각종 고교와 대학의 야구대회가 개최되었고, 숱한 연습경기와 학원스포츠의 장으로서 매우 집약적인 공간 활용이 이루어졌다. 동대문 운동장은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보더라도 활용도가 가장 높은 구장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장한지 80년이 넘자 낙후된 동대문운동장은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즈음하여 동대문운동장은 사망선고를 받는다. 축구장은 2003년 풍물시장 및 주차장으로 이용되면서 체육시설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2006년 부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설이 노후하고 기능이 저하된 동대문운동장 터에 역사와 첨단, 물과 숲, 문화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다목적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 발표하였다. 공원 옆에 건설될 ‘세계적 디자인·패션 산업의 메카’가 될 6층 높이의 ‘디자인 월드플라자’도 건설 계획도 발표하였다. 이후 동대문운동장의 활용방법을 놓고 조용한 갈등이 일어났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오는 11월 일방적으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고 디자인월드프라자를 건립하겠다고 합니다. 축구, 야구, 수영 등 우리나라 근대스포츠의 출발점이자 정치, 사회·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 역사적 공간이며 940개 점포 풍물시장 상인들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동대문운동장의 가치는 이미 내팽개쳐 놓은 지 오랩니다. 오직 동대문운동장을 부수고 그 일대를 세계적인 디자인·패션산업의 중심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과욕의 단추를 계속 꿰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밀한 도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원 조성에 찬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 역시 서울시의 공원화 사업과 디자인월드프라자 건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건축기술을 토대로 동대문운동장 보존을 기본 원칙으로 리모델링 작업을 해서 시즌 중에는 경기장으로, 평소에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개방형 운동장으로 변모시키자는 것입니다. 변변한 스포츠 박물관 하나 없는 형편에 100년 근대체육의 성지인 동대문운동장을 한국 체육사를 기념하는 사적 공원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풍물거리로 재탄생 시키자는 것입니다. * 동대문운동장 철거 반대와 보존을 위한 100인 선언문 중
동대문운동장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다. 2007년 12월부터 철거에 착수하였고, 2012년 현재, 디자인플라자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 서울시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디자인플라자가 완공되면 서울은 세계 5대 패션도시로 진입하고, 패션사업 매출액이 10년 내에 현 20조 원에서 30조 원으로 증대될 것이라고 한다. 연간 210만 명 찾아오던 외국인 관광객도 280만 명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으로 이곳은 전 국민이 앞 다투어 찾고,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의 공간으로서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키고, 천만 시민의 휴식터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가치는 서울시가 말하는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가치로 대체되었다.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은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으면, 그곳에 깃들었던 삶의 추억들도 쉽게 잊힐까. 동대문운동장은 한국사회에 몇 안 되는 역사적 스포츠 공간이었다. 역동하는 자본주의 도시 공간 속에서 스포츠를 매개로 이루어졌던 소중한 기억의 가치들은 자본이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들로 대치되어졌다. 동대문운동장의 사례는 자본주의 도시 공간 내 사적자본 축적논리에 따라 사라져가는 역사적 스포츠 공간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2012년 5월 18일
한국스포츠사회학회 특별세미나
경남대학교 본관 4층 대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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