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오프사이드는 왜 반칙이 되었나?



VAR이 도입된 2019-2020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레스터의 경기. 최종수비수보다 고작 1.6cm, 발도 아닌 어깨가 앞서 있던 손흥민은 득점하고도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오프사이드 판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스포츠가 선사하는 궁극의 짜릿함은 단연 득점에 있겠지만, 축구는 오프사이드로 인해 전후반 90분을 줄기차게 뛰고도 1:0 심지어 0:0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 경기가 비일비재하다. 다른 스포츠들이 더 많은 득점으로 더 재미있는 경기를 만들기 위해 변화를 마다하지 않는 판국에 축구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규칙이 버티고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오프사이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 중세의 마을과 마을, 집단 축구를 벌이다.

축구는 수백 년 전부터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행해오던 여러 집단적 공놀이에서 기원했다. 거리, 공터, 들판, 다양한 공간에서 이 마을과 저 마을의 사람들이 서로 편을 갈라 집단으로 공놀이를 펼쳤다. 영국의 내펀, 스콘볼, 벌룬볼, 스토볼, 윈드볼, 캠프볼, 프랑스의 슐 등 지역에 따라 이름과 형식도 다양했다. 지금처럼 발만 사용한다는 규칙도 없었고, 참가인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다만 이 경기들은 모두 공 하나를 가지고 몰려다니며 집단으로 엉겨 붙어 상대를 거칠게 밀치고, 걷어차고, 쓰러뜨리는 등 난장을 피운다는 것, 그 한 가지 점에서 일치했다. 죽이는 것만 빼고 다 허용된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때때로 폭력적이었지만, 겨울을 몰아내기 위한 참회제, 봄을 맞이하기 위한 풍작제, 통과 의례로서 성인식 등 종교적 제의에 맞춰 지역마다 연례행사로 열렸다. 그렇다면 이 전통적 축구와 오프사이드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로서 오프사이드

‘오프(off)’는 떨어져 있다는 뜻이고, ‘사이드(side)’는 팀이라는 뜻이다. 아군 적군이 명확한 이항대립의 충돌인 축구에서 오프사이드란 “팀에서 떨어져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게 왜 문제였을까. 전통 방식의 축구는 정교한 패스와 기술 중심의 경기가 아니었다. 공 하나를 두고 밀고 당겨 드잡이를 만들고 힘과 투지로 돌진하는 경기였다. 공동체의 남성 성원들은 모두 축구에 참여해 사교와 결속을 다졌고, 갓 성년을 맞이한 청년들은 스크럼 속에 뒤엉킴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축구를 통한 상호연대 속에서 남성성을 과시하고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서로가 힘을 합쳐 만든 밀집 상태에서 떨어져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했을까. 남자답지 못한 자, 공동체에 속할 자격이 없는 자로 낙인찍혀 비난받지 않았을까. 민속경기였던 전통 축구를 계승한 19세기 중반의 영국의 퍼블릭스쿨. 이곳에서 오프사이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서 학교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규제되었다. 그리고 1863년 영국에서 최초의 FA가 결성되고 협회가 관장하는 공통의 규칙이 만들어졌을 때 오프사이드는 이렇게 성문화된다.

“한 선수가 킥했을 때 상대 골라인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같은 편 선수는 그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플레이에 관여하거나 공을 건드릴 수 없고 상대를 방해해서도 안 된다.”

초창기 축구는 지금의 럭비처럼 패스를 옆이나 뒤로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진은? 패스가 아닌 드리블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렇게 묶어놔야 밀집 형태로 돌진하는 경기가 이루어지고 그것이야말로 남자다움을 발휘하는 축구의 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오프사이드와 오래 즐기기 전통

민속경기로서 전통 축구는 시간을 정해 놓고 다득점을 한 팀이 승리하지 않았다. 어쩌면 승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순절을 앞두고 영국 전역 40개 도시에서 일제히 벌어진 참회 화요일(Shrove Tuesday) 축구를 보자. 부활절까지 예수가 겪었을 고난을 생각하며 무려 40일을 금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참회 화요일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금욕생활을 잘 견디기 위해 억압된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는 시간, 오후 2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축구에 참가해 대규모 소란을 피웠다. 이 소란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는데 점수가 나면 그것으로 축제도 끝이었지만, 밤 10시가 되어도 골이 나오지 않으면 그다음 날에도 경기는 계속되었다. 참회 화요일이 지나고 경건의 시간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까지 계속되었던 집단 축구. 축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축구는 이겨야 한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무리 속에 포함되어 억압된 본능을 분출하고 오랫동안 즐긴다는 의미가 강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1골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골이란 축제의 종료이자 사순절 금욕기간의 시작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축구와 럭비가 아직 한 몸이던 1844년, 영국의 럭비학교가 만든 최초의 풋볼 규칙에는 “경기가 득점 없이 5일 또는 3일 동안 계속되면 무승부로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축구가 3일 심지어 5일 동안 득점 없이 계속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거리의 축구가 학교 운동장으로 그 장소를 옮기고 나서도 일정 시간 내 다득점을 한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 축구의 오래 즐기기 방식이 이어졌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오프사이드는 운동장이란 변화한 환경에서 쉽게 득점할 수 없도록 즉, 경기를 더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장치로서 구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경기 시간이 전후반 90분으로 정해진 건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결성되고도 한참 후인 1877년의 일이다.

▣ 오프사이드 없는 축구는 축구가 아니다.

오늘날 오프사이드는 상호연대나 오래 즐기기의 기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현대 축구를 가장 특징적으로 대변하는 빌드업, 압박, 전환과 같은 전략 전술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오프사이드를 전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역사는 이렇듯 중세부터 이어 온 오프사이드의 전통이 오늘날의 축구에 녹아들어 그 체계를 형성했다고 얘기한다. 전통의 체계 속에 시간의 축을 따라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 축구. 더 많은 득점과 재미를 위해 오프사이드 규칙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 오프사이드가 없는 축구는 축구가 아니다.

출처: 서울스포츠 2020년 4월호 No. 354. 스포츠 잡학사전



조회수 5회댓글 0개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