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
우리 사회가 다루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순수하게 상업적인 알선이든 군대에서 위탁받은 업자든 군속의 꼬임에 넘어간 동원이든 군대 트럭에 의한 납치든 동원의 성별성이다. 성산업에서 ‘포주(抱主)’는 정확한 역할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어감이 좋지 않으니 에이젠트(agent)라고 하자. 이들은 이른바 알선업자, 대리상(代理商)이다. 남의 일이 잘되도록 주선하는 행위는 일상에서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바다. 예를 들어 나는 컴퓨터를 잘 몰라서 지인에게 대신 구매를 부탁할 수 있다.
이처럼 알선업자, 대리상이 취급하는 대상은 상품이나 인간의 노동력(용역)이지, 인간 자체가 아니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폭력의 한 형태냐는 논쟁에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현실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성매매에서 거래되는 것은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 여성의 몸 자체다. 강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갔다.”는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군 ‘위안부’에 대한 다양한 이론(異論)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매매, 성폭력 제도의 본질적 공통점은 남성의 성은 남성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지만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에서 분리된다는 점이다. 남성의 성은 남성 개인의 몸에 소속되어 있다. 여성의 성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가족, 그리고 그녀의 소유자인 남성의 자원이거나 상징이다. 남성의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대상화된다. 유통, 기부, 거래, 순환 등 교환 가치를 지닌다. 남성 간 정치의 매개물이 되거나 강자들의 싸움터(battle ground)로 제공된다. 우리가 성 상품화, 여성의 대상화라고 부르는 현실이 이것이다. 내가 스스로 팔든 남에게 팔리든, 성매매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object)이 됨을 의미한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정희진 저
정희진의 박유하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자신의 관점에서의 해석이란 생각이 드는데, 둘의 관점이 차이가 있는 거 아닌가. 정희진은 구조적인 얘기에 천착되어 있고, 박유하 그 구조 속 역사적 여성이 처한 현실을 얘기하려 했던 거라 생각이 드는데
정희진의 글은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 문제와 성매매 논쟁을 다루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특히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성매매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주요 내용과 이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사용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1. 정희진의 비판 요점
• 성매매와 성적 대상화의 본질:
정희진은 성매매 논쟁에서 여성의 몸이 단순히 “노동력”이나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을 넘어서, 여성 자체가 상품화되고 대상화되는 현실을 문제 삼습니다. 그녀는 성매매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나 경제적 활동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여성의 성이 남성, 국가, 가부장적 구조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구조적 억압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 ‘자발성’에 대한 비판:
박유하가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갔다”는 주장을 포함한 다양한 입장을 다룬 점에 대해, 정희진은 이를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간주합니다. 이는 성매매의 맥락에서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 성별 권력 구조와 여성의 성 상품화:
정희진은 남성과 여성의 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인식되고 거래되는지 분석하며, 여성의 성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이나 국가의 소유 자원으로 대상화되고 교환된다고 지적합니다.
2. 정희진과 박유하의 관점 차이
• 박유하의 입장: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일본의 전쟁 범죄나 강제 동원 문제로 한정짓지 않고, 당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 제국주의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다각적으로 접근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위안부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묘사하지 않고, 그들의 선택과 행동을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보였습니다.
• 정희진의 비판:
정희진은 박유하의 접근이 위안부를 “자발성”이라는 틀로 분석하면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구조적 억압의 본질을 간과한다고 봅니다. 그녀는 이를 여성의 성이 국가와 남성 권력에 의해 관리되고 대상화되는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정희진에게 있어,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당시 상황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구조와 여성 억압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3. 정희진의 해석이 과도한가?
• 정희진의 관점의 의의:
정희진은 여성 억압과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재조명하려 했습니다. 이는 박유하가 위안부를 “개인의 자발적 선택” 또는 “식민지 복잡성”으로 설명하려는 접근이,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성별 권력 문제를 상대적으로 희석시키거나 부차화할 위험성을 경계한 것입니다.
• 정희진의 해석의 한계:
사용자가 지적했듯이, 정희진의 관점은 박유하의 의도를 지나치게 자신의 여성주의적 해석 틀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박유하가 위안부 문제를 다루며 역사적 맥락과 복잡성을 설명하려 한 시도는, 단순히 가부장제와 성별 권력의 틀로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희진의 비판이 박유하의 논지를 축소하거나 지나치게 재구성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 견해의 차이:
박유하는 위안부를 “역사적 인간”으로 다루며, 그들의 경험과 선택을 특정 맥락에서 이해하려 했고, 정희진은 이를 구조적 억압의 맥락에서 해석했습니다. 두 접근은 상호 배타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즉, 박유하가 말하려는 맥락의 복잡성을 인정하면서도, 정희진이 지적하는 구조적 성차별과 여성의 성 상품화 문제를 병행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4. 결론
정희진의 비판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와 성매매를 구조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박유하의 복잡한 역사적 접근을 자신의 틀로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치환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 관점을 균형 있게 비교하며 논의한다면,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개인의 선택과 구조적 억압 사이의 긴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둘의 관점이 차이가 있는 거 아닌가. 정희진은 구조적인 얘기에 천찬되어 있고, 박유하는 당대의 그 구조 속 역사적 여성이 처한 현실을 얘기하려 했던 거 아닌가
사용자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논점을 짚고 있습니다. 정희진과 박유하의 접근 방식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서로 다르며, 이는 두 사람의 관심사와 이론적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더 명확히 살펴보겠습니다.
1. 정희진의 관점: 구조적 분석에 집중
• 정희진은 위안부 문제를 여성 억압의 구조적 맥락에서 다루며, 이를 성별 권력 불평등과 가부장적 억압 체제의 일환으로 봅니다. 그녀의 주요 초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성 상품화와 여성 대상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나 개인의 경험으로 보지 않고, 여성의 성이 국가와 남성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거래되는 구조적 현실로 간주합니다.
•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의심: “자발적”이라는 개념이 종종 구조적 억압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고 비판합니다. 그녀는 자발성을 강조하는 논의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며, 이를 가부장제의 일환으로 봅니다.
정희진에게는 위안부 문제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지속되는 여성 억압의 구조적 본질을 드러내는 사례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개인의 경험보다는 이 문제를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2. 박유하의 관점: 역사적 맥락과 복잡성에 주목
•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으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위안부의 경험과 선택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접근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위안부: 박유하는 위안부를 단순한 피해자로 국한시키는 대신, 그들이 당시의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주목했습니다.
• 복잡한 식민지 상황: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발생했으며, 이를 단순히 국가 간의 폭력이나 구조적 억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 자발성과 강제성의 경계: 그녀는 당시 위안부의 일부가 강제로 동원되었지만, 일부는 경제적 이유로 위안부가 되는 것을 선택했을 수 있다는 점을 논의의 일환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피해자성을 절대화하기보다, 그들의 다층적 경험을 조명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3. 두 관점의 차이
• 초점의 차이:
• 정희진은 여성 억압의 구조적 본질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며, 위안부를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의 사례로 이해합니다.
•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복잡하게 이해하려 하며, 위안부를 단순히 피해자나 상징으로 보는 대신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현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 분석 방식의 차이:
• 정희진은 위안부 문제를 젠더 권력의 맥락에서 분석하며, 이를 보편적 여성 억압의 사례로 간주합니다.
• 박유하는 위안부를 식민지 역사의 맥락에서 분석하며,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위안부가 처한 현실과 선택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 자발성에 대한 입장 차이:
• 정희진은 “자발성”이라는 개념을 구조적 억압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논리로 봅니다.
• 박유하는 자발성과 강제성의 경계를 논의하면서, 위안부가 처했던 다양한 현실과 선택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4. 정희진의 비판에 대한 평가
• 정당성: 정희진의 비판은 박유하의 논의가 여성 억압의 구조적 본질을 간과하고, “자발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위안부 문제를 젠더 권력과 가부장제의 틀에서 보려는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유의미한 비판입니다.
• 한계: 하지만 정희진의 비판이 박유하의 논지를 지나치게 자신의 구조적 해석 틀에 맞추어 읽으려 했다는 지적도 타당합니다. 박유하의 목적은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젠더 구조나 피해자로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역사적 맥락에서의 다층적 현실을 탐구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희진의 접근은 구조적 분석에는 유의미하지만,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경험의 다양성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5. 결론
정희진과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초점과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희진은 위안부 문제를 구조적 억압의 사례로 보고 젠더 권력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며, 박유하는 위안부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인과 현실의 복잡성을 조명하려 합니다. 두 관점 모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박유하의 시도가 단순히 여성 억압 구조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희진의 비판이 지나치게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두 관점을 상호 보완적으로 접근하며 구조적 문제와 역사적 현실을 동시에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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