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의 재도약과 그 배경
최종 수정일: 6월 28일
이 연구는 1960년대 체육단체 간의 역동을 조명하기 위해 체육원로 故 이종택 선생의 구술자료를 활용한다. 이 자료는 2006년 11월에 녹취되었지만, 연구자의 능력 부족으로 그동안 발표되지 못하고 묵혀있었다. 그러나 이 자료에는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가 추구했던 이상과 도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한체육회와의 역동의 과 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학교체육회의 활동과 그 의의를 살펴보는 데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판 단되어 구술자의 사후에라도 자료를 발표하고자 한다. Benjamin(2009)은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봐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처럼 2000년 이후 등장한 ‘공부 하는 학생선수 담론’, ‘학교체육진흥법의 제정’,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문’에 따른 ‘학생선수 대회출전 횟수 제 한’과 ‘최저학력제’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과거 대한학교체육회의 활동은 현대적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의미를 제공한다.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가 직면했던 학교 체육의 이상과 도전 그리고 대한체육회와의 역동을 탐색하는 과정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학교체육이 마주 하고 있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Ⅲ.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의 재도약과 그 배경
대한학교체육회는 공식적으로 1956년에 설립되었다(조선일보, 1956.08.09.; 경향신문, 1956.08.09.). 그러나 창립 이후 특별한 활동이 없다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1965년 3월 20일 대한학교체육회는 정식 사단법인으로 발족하였고(조선일보, 1965.03.20.), 1966년부터 사무처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966년 4월에 발행된 ‘학교체육 5호(대한학교체육회 발행 잡지)’에서 김준기 부회장은 “본회는 그 대의명분도 뚜렷하며 그 목적이나 사업내용도 당당하였건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라면서, “1966년에 이르러 대한학교체육회가 비로소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고 본격적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태세와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김준기, 1966). 이 장에서는 대한학교체육회가 재도약하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본다.
1. 대한학교체육회의 재도약 배경
1960년대 중반에 대한학교체육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구술 1>을 통해 당시 대한학교체육회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 이종택 구술 1: 그 당시 학교체육의 현황은 올바른 학교체육의 정도를 간 것이 아니고 이른바 전원 체육이었어요. 학교체육 비를 징수하면, 규정에는 체육 활동비, 용구 비 등 사용해야 하는 비율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걸 모두 무시하고 학교체육 비 전부를 운동부에 써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서 학부모한테 돈까지 받았죠. 기부금 모집법이 생기기 전이니까. 학교가 체육과 관련된 돈을 다 운동부에 몰아주고, 훈련하고, 대회출전하고 그랬죠. 학교체육의 목적과 가치에서 벗어난 거죠...... ◯◯고등학교가 가장 체육이 왕성한 학교라고 칭찬을 받았는데, 실제로 ◯◯학교에 가서 실상을 알아보면 축구, 배구 이 두 종목에 모든 재원을 몰아주고, 전국 대회를 내보내 메달을 따는 거예요. 언론도 문제였죠. 신문에서는 계속 ◯◯고등학교, ◯◯고등학교 이렇게 선전을 하고, 잘하는 선수들이 그 학교로 몰리고, 마치 이렇게 하는 게 학교체육을 100% 성공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시켰으니까.
<구술 1>은 당시 학교체육의 문제점에 대해 언급한다. 먼저 균형 있게 분배해야 할 체육 재원을 소수 운동부에 집중하여 사용하는 소위 ‘재원 몰아주기’ 현상이 있었고, 이를 이종택 선생은 전원(全員) 체육이라 호명하였다. 그는 이 재원 몰아주기 현상에 대해 “학교체육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에서 벗어난 처사”라 한탄했다. 이종택 선생의 <구술 1>은 학교체육 재원의 운동부 집중 문제를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 문제뿐 아니라 학교체육회는 출범 당시부터 최인범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체육시설의 소수 운동선수 독점’, 운동부 이용 학교 홍보, 학생선수 혹사’, ‘스카우트 등 학원스포츠의 프로화’, ‘체육 현장의 체벌’, ‘교육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지나치게 많은 경기대회’ 등의 문제를 신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최인범, 1956.09.03.; 최인범, 1957.10.25.; 최인범, 1955.05.13. 최인범, 1956.01.26.).
2. 과도한 대외경기 개최에 대한 교육계의 반발
<구술 2>에서 이종택 선생은 학교체육의 정통성이 무엇인지 강조하며, 그 이상이 정과체육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는 1960년대 대외경기를 통한 학교 운동부 간의 치열한 경쟁이 학교체육 왜곡의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대외경기의 무분별한 확장을 교육계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고 진술한다.
#이종택 구술 2: 정과 체육이 학교 교육과 가장 맞다. 왜냐하면 고종의 교육 칙령 제4호에 의거해서 지, 덕, 체를 신교육의 개념으로 세웠죠. 체육이 그때부터 있었던 거란 말이에요. 그때는 체조라고 했었죠. 지, 덕, 체 중에서 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1/3이다. 그때부터 계속 내려왔는데, 학교체육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대외경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학교체육회는 대한체육회에 불만이 많았어요. 우리 학교체육을 위해 해 놓은 게 뭐가 있냐 말이야. 각 경기단체에서 종목별로 중․고대회, 무슨 대회 열면, 선수단 모아놓고 상장 하나 주고, 메달 하나 주고 끝내버리고. 육성책을 마련해주나, 보조를 해주나, 아무것도 없단 말이지. 학교체육은 완전히 내버려 두고, 너희들 마음대로 논거 아니냐. 우리가 너희들의 꼭두각시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어요...... 결국 정과체육이라는 것이 가장 교육적인데, 학교체육이 왜곡된 방향으로 가는 게 바로 대외경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이러한 모든 불만이 모였고, 학교체육이 이런 식으로 가선 안 되겠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 체육교사와 체육교수들이었어요.
1960년대 중반, 대한체육회와 그 산하단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많은 경기대회를 통해 세를 과시하였다. 특히, 1964년 동경올림픽 참패 이후 대중은 체육회와 산하 경기단체에 강력한 책임을 요구하였다(동아일보, 1964.10.28.; 동아일보, 1964.11.05.; 동아일보, 1964.10.24.; 조선일보, 1964.10.17.). 이 같은 상황에서 국제대회에서의 저조한 성적을 만회하고, 국가대표 유망주 조기 발굴이라는 명분은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대외경기 확대를 정당화하는 빌미로 작용했다. 그런데 1965년 당시 문교부는 빈번한 대외경기대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한체육회에 시즌제 도입을 명령하여 대외경기 개최에 제동을 건다. 문교부는 “연중무휴로 운동경기가 진행될 경우, 운동선수의 학업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경기 응원에 동원되는 폐단이 많다”며, 봄과 가을, 즉 3월 중순부터 5월과 9월부터 10월까지만 학교체육 활동 ‘시즌’을 설정해 대외경기대회를 진행하도록 대한체육회에 지시하였다(조선일보, 1965.03.16.; 조선일보, 1965.03.19.). 이에 대한체육회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대한체육회는 “시즌제는 학원체육 강화방안이 아니라 위축시키는 방안”이라며, “1년 동안의 행사를 짧은 기간으로 축소한다면, 오히려 연습 등으로 공부를 못하게 될 것”이라며 “모든 연맹을 동원해서라도 철회 촉구할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조선일보, 1965.03.16.; 조선일보, 1965.03.19.). 실제로 민관식 회장, 김종렬 전무이사, 유근석 이사는 문교부 장관을 만나 방침의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였다(조선일보, 1965.03.31.). 결과적으로, 학교체육 대회의 시즌제는 문교부가 이 사안을 대한체육회에 일임하여 체육회가 자율적으로 경기대회 개최를 조절하고 제한하게 함으로써 좌절된다(1965.04.02.).
이상의 내용은 정부 부처인 문교부의 조치를 민간단체였던 대한체육회가 반발하여 뒤집은 사건으로, 당시 대한체육회의 정치적 위력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민관식의 역할을 주목할 만하다. 대한체육회장 민관식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체육계에 정부의 의지를 관철하는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였다(한승백, 2023). 박정희는 각 분야에 대리인을 배치하거나 전문가 집단을 장악해 이들을 철저히 관리하는 봉건적 지배 시스템을 통해 정권을 유지했는데, 체육 분야에서는 그 역할을 민관식(재임기간 1964.1.19~1971.7.10)이 맡았다(허진석, 2008: 18; 한승백 2011). 이런 이유로 대한체육회는 다른 민간단체와는 달리 박정희의 지지와 국고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문교부가 지시한 경기대회 개최 제한 조치(1965년 3월)와 대한학교체육회의 사단법인 발족 시기(1965년 3월 20일)가 겹치기 때문에 학교체육회가 시즌제 도입에 영향을 미쳤다고 유추할 수 있으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 확신하기 어렵다.
최인범(1919~1979) 선생은 1956년 대한학교체육회 출범 당시 상무이사 직을 맡았고(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1965년 사단법인으로 발족할 당시에는 이사장(명지대학교)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언론에 대한학교체육회의 이름으로 학교체육회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개진하였다.
허진석(2008)은 민관식이 박정희를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태릉선수촌 건립을 들었다. 민관식이 박정희의 지지를 토대로 왕릉이 산재한 부지에 선수촌을 건립할 수 있었고, 이는 민관식의 생전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민관식, 2005.12.07.; 민관식, 2006.05.22.). 이와 관련하여 이종택 선생은 “대한체육회로부터 KOC가 독립할 당시, 훈련기능을 대한체육회로부터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것, 대한체육회가 68년도 6월 30일, 태능선수촌을 KOC가 아닌 대한체육회가 오픈 한 사건이 KOC의 큰 실수”라고 지적하였다.
출처: 한승백(2024). 체육원로 인종택 선생의 구술을 통해 본 1960년대 대한학교체육회의 이상과 도전 그리고 역동.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37(2),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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