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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1968년의 체육특기자제도

1964학년도부터 1968학년도까지의 대학입시는 국가고사 없이 전․후기 각 대학별로 시험을 치렀다. 앞서 해방이후부터 62년까지의 국가개입 공백기와 마찬가지로, 대학별 자율선발 체제 아래서 대학의 우수선수 영입전략은 보다 쉽게 관철될 수 있었다. 체육특기자 선발과 관련하여 문교부는 일반응시자와 함께 응시하되 정해진 기준에 의거 특전을 부여하였고, 합격자의 선정은 각 대학에 일임하였다(경향신문, 1963.06.19.). 단 연세대나 고려대 같이 체육계열학과가 없는 경우 대학정원의 2%(66학년도는 3%)로 특기자 선발 인원을 제한하였고, 체육대학이나 체육학과가 있는 한양, 경희, 숙명 등에서는 문교부가 지시한 비율에 관계없이 우수선수를 우선적으로 모집할 수 있었다(동아일보, 1965.02.16.).


문교부가 제한한 모집정원 2~3%의 제한은 예술체육특기자에 대한 것이지 반드시 체육특기자로 한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운동부를 육성하던 대학들은 특기자 전형의 대부분을 체육특기자로 충원했다. 가령 65학년도의 경우, 고려대와 연세대는 예술체육 분야 특기자 모집정원의 2%에 해당하는 인원(고려대 24명, 연세대 26명)을 모두 체육특기자로 선발했다(동아일보, 1965.02.16.). 예술특기자에 모집 인원을 할당하기에는 다른 대학과 경쟁 상태에 있는 운동부의 경기력 유지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립대학들은 재정적자 만회 명목으로 시도한 수업료 인상요구가 좌절되자 그 대안으로 정원초과 모집이란 방법을 택했다(강태중 외, 2013). 대학별 선발체제에 정원초과 모집까지 활발해지자 스카우트 관행으로서 특기자제도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수선수를 선발하기 위한 각급 학교의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운동부를 운영하던 학교들은 전국을 샅샅이 뒤져 선수를 스카우트했다(동아일보, 1966.01.26.; 조선일보, 1966.11.20.; 조선일보, 1968.01.21.). 선수와 학교 간 일어나는 금전 뒷거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대학을 다니던 선수가 지역을 옮겨 고교선수로 뛰거나, 군에 복무하던 선수가 제대 후 고교 선수로 뛰는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67.11.29.; 동아일보, 1967.11.08.). 중앙대에서 농구부로 3년을 보낸 한 선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연세대 농구부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경향신문, 1967.11.29.). 고려대와 연세대의 스카우트 경쟁 속에서 선수가 먼저 대학에 금품을 요구하여 졸업이 보류되는 일도 벌어졌다. 유망선수 한 명에 몇 명의 후보가 덤으로 입학하고, 숙식 및 전액장학금 제공 등 학원 스포츠 상업화의 폐단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동아일보, 1968.02.12.; 동아일보, 1969.12.11.). 심지어 과열 스카우트 경쟁 속에 학교 지도자와 교사가 학생을 납치, 감금하거나, 학부모를 폭행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경향신문, 1966.01.06.; 조선일보, 1966.01.07.). 해마다 반복되는 스카우트 전쟁을 당시 언론은 “계절풍”이라 불렀다.


체육계의 계절풍인 스카우트 열풍은 올해도 스포츠계를 휩쓸고 있다. 과열된 스카우트 전은 마침내 여자배구의 명문으로 알려진 부산의 남성여고와 부산여고가 중심선수를 모조리 서울에 빼앗기고 배구팀의 해체에까지 이르렀다...... 금전문제가 개입됐다는 풍문이 있는가하면 합숙하는 선수를 끌려고 밤마다 합숙소 근처에 고급차가 그칠 날이 없다는 등...... 3, 4년이란 오랜 세월과 경비를 들여서 애써 길러 놓은 선수를 훔쳐가는 격의 이러한 지나친 스카우트전은 오직 순수해야할 스포츠의 후퇴를 뜻하는 많은 부작용만 가져올 뿐이다(경향신문, 1968.02.19.).

입시제도의 틀 안에서, 자격을 갖춘 선수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해 진학하는 데에 분쟁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명목상 특기자제도가 학생을 진학시키는 ‘입시제도’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입학사정의 기준이 되는 학교별 입학고사로부터 면제되는 까닭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운동능력만을 기준으로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스카우트제도’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시금 허락된 자율선발의 환경과, 거기서 극대화된 대학과 체육계의 이해가 감행한 ‘간편한 선수수급’ 행태는 돈과 인맥, 심지어 협박과 폭력을 동반하기도 했다. 이러한 스카우트 관행은 그 나름의 시장과 이해관계를 만들어내면서, 대학입학자격고사의 재도입 속에서도 건재하게 되고, 계속적으로 체육특기생을 ‘학교에 소속되었으나 재학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위치에 묶어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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