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테니스 인구의 증가와 사설 테니스장
최종 수정일: 2022년 2월 19일
김의진(71세)은 60년대 대학 생활을 했고, 71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체육교관을 지내면서 처음 테니스를 접했다. 그에 따르면 학창시절 그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 내에 이미 테니스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학생 신분으로서 테니스를 친다는 것은 상상 못할 일이었고,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은 교수들, 그중에도 일부 유학파 교수나 의과대학 교수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75년 그가 제대 후 교수가 되어 대학에 돌아왔을 때, 대학에는 교양과정으로 테니스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60년대 연식정구 선수로 활약 했다는 정보제공자 김원종(69세)은 테니스가 점차 보급되면서 테니스와 연식정구를 병행했지만 테니스코트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그는 한 제약회사 뒤뜰에 있었던 테니스장에서 사장과 간부들을 레슨 해주는 조건으로 코트를 사용할 수 있었고, 자신도 본격적으로 테니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길거리에 라켓을 들고 다니는 것조차도 어색한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한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예외적이고 특수한 취향에 해당하였던 테니스, 그러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뀐다. 상류계층의 전유물이던 테니스가 서울 도심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발행된 일간지들은 테니스인구의 증가 현상을 ‘폭발적’이라 묘사하였다.
폭발적인 테니스 인구의 증가로 테니스코트가 계속 늘어가고 있다. 시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레저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는 테니스 붐을 타고 일반테니스 팬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영업용 테니스코트가 잇따라 생기고 있다(경향신문, 1973.02.22).
서울시내 곳곳에 테니스 붐이 절정을 이뤄 클럽이 다투어 생겨나고 있다. 부유층이 체력관리를 위해 붐을 일으켰던 골프가 주춤해지자 테니스가 활기를 띠고 있다. 요즘 테니스 복장을 한 채 라켓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잖게 눈에 띤다(동아일보, 1973.06.01).
최근의 테니스 붐은 거의 폭발적. 시민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레저스포츠로 각광 받은 테니스는 사교의 수단으로 발전하면서 그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다. 주말이면 테니스 라켓을 들고 하얀 유니폼 차림의 젊은이들이 거리를 누비고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시내 곳곳의 코트마다 초만원을 이룬다(경향신문, 1973.08.23).
60년대 초, 대한테니스협회가 추산한 테니스 인구는 5백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72년의 테니스 인구는 3만 명(경향신문, 1972.08.05), 76년에는 60만 명 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경향신문, 1976.09.09). 서울에는 테니스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테니스장이 도시 곳곳에 출현하였다. 이른바 ‘사설 테니스장’의 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72년 한 신문보도가 집계한 테니스장 현황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는 ‘워커힐(2면)’, ‘덕수궁(2면)’, ‘용산(8면)’, ‘남경(12면)’, ‘신림(1면)’, ‘한강맨션(6면)’, ‘신촌(2면)’, ‘남강(10면)’ ‘페릭스(12면, 고양군)’ 등, 70여 면의 사설코트가 있었다. 공공체육시설로는 ‘서울운동장(2면)’ 대한테니스협회의 전용 코트인 ‘장충코트(8면)’가 있었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기는 했지만, 학교(약 70면), 관공서(약 35면), 은행(약 30면)까지 72년 서울의 테니스코트는 약 200면에 달했다(경향신문, 1972.10.19). 73년에도 ‘유니온(5면)’, ‘데이비스(8면)’ 등이 사설 테니스코트가 연이어 문을 열었고, 공공시설로서 서울시가 운영했던 ‘효창운동장(6면)’ 코트도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상당수의 기존의 코트들이 면을 증설하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73년 말 기준, 서울시내의 영업용 테니스장은 81개소 4백37면에 이르게 되었다(경향신문, 1973.11.27).
오늘날 도심 속에는 시민을 위한 다양한 여가 공간의 존재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50~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시민 대다수가 생활난과 주택난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변변한 여가생활이나 여가공간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런데 70년대 초 테니스의 붐과 함께 서울 도심에 여가공간으로서 테니스장이 등장하였다. 이는 곧 산업화 이후 테니스를 여가로서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수요 계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테니스 소비의 주체로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도시 중산층들이다. 60년대 경제개발 이래 빠른 시간 동안 부를 축적하면서 하나의 독립된 계층으로 형성된 서울의 중산층들은, 고도 성장 시대 성장의 주역이자 수혜자로 등장한 사람들로 중간계급의 상층에 해당한다. 이들은 주로 기업간부, 전문직 종사자, 숙련직 노동자, 공무원 등 폭 넓은 범위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 하나의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문옥표, 1992: 57-72, 홍두승, 2005). 70년대 초반 유행처럼 테니스를 소비하기 시작한 계층은 고도 성장시대 산업화를 이끌던 이들 도시중산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 유행과 소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었고, 일부 극소수의 상류계층에 의해 향유되던 테니스가 서울의 도시중산층을 거쳐 점차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승백(2013). 도시 공간 테니스장의 사회적 생산과 소멸에 관한 연구: 사설 및 아파트 테니스장을 중심으로.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26(1), 12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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