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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1963년의 체육특기자제도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11일

여전히 체육특기자제도가 군사정부에 의해 1972년에 생겨났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체육백서 같은 정부 문서도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60년대 신문만 들춰봐도 터무니 없는 주장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체육특기자제도를 1972년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게 단순히 연도의 착오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2년은 유신이 선포된 해였고, 이 제도를 자연스럽게 국가주의 스포츠에 국한하여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간과하게 되는 게 행위자이다. 체육특기자제도 72년 기원의 왜곡 주장은 이 제도가 왜 이렇게 뿌리깊이 한국 학원엘리트스포츠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행위자가 어떻게 역할 했는지에 대한 인식을 잊게한다는 것이다.


체육특기자제도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체육특기자제도는 스카우트란 관행과 연동해서 생각해야 한다. 학생선수의 학교 입학은 정해진 입학 전형에 따라야 한다. 특히 대학은 그렇다. 그런데 스카우트는 사전에 상급 학교의 지도자 또는 대학이 하급 학교의 지도자 또는 학부모와 사전 접촉해 입학 전형과 상관없이 선수의 진학을 약속하는 관행이다. 스카우트는 각 학교 간 경쟁의 산물이지 국가주의스포츠나 10월 유신, 박정희와는 관련이 없다. 이 관행은 일제시대부터 있어왔고 (요즘은 일제시대 신문도 쉽게 검색 가능하다.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은 연락), 50년대에는 학교 간 경쟁이 너무 치열해 선생들도 합새하여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60년대에는 선수를 납치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체육특기자제도는 이 관행을 공식적인 입학전형 체계 속에 제도화한 것이다.


둘째, 비공식적(학생도 아닌 자를 학생 이름만 붙여서 학교 대표로 뛰게하는 방식)이든 공식적이든(입학전형의 절차를 거치지만 사전 약속 담합으로 입학을 약속 받는 방식), 체육특기자제도는 국가의 입시제도와 무관할 수 없다. 해방 이후에는 각급 학교의 선수 스카우트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자율로 학생을 선발했으니까. 그런데 62년도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국가고시란 것을 도입하면서 이 스카우트 제도에 제동이 걸린다. 아래 스토리는 제동이 걸린 스카우트 제도에 누가 반발하고 어떻게 걸린 다시 부활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아이러니 한 것은 군사정부는 72년 국가주의 스포츠를 내세워 체육특기자제도를 만든 게 아니라 이전까지 대학 자율에 맡겼던 대학입학고사를 일원화 시켜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입학하도록 함으로서 자유로운 방식으로 선수를 스카우트하던 각 대학이 이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어떻게 입학제도에 의해 이 스카우트 관행이 제동이 걸리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어떤 주체에 의해 이 스카우트 관행이 제도 속으로 안착되는가"이다. 아래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여기에는 학교 뿐 아니라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엘리트스포츠 세력의 역할이 중추적이다. 그러니까 체육특기자제도의 이해는 스카우트 관행의 입시제도에 의해 제동과 흡수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변증법을 이해해야 지금의 학원엘리트스포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왜 여전히 그런지에 관해서는 나중에 쓰기로 한다. 서론이 길었다. 2017년 지금은 러프버러 대학에 있는 탁민혁 교수와 스포츠사회학회지에 발표한 '72년 이전 체육특기자제도의 궤적' 논문의 일부이다.

 

2. 정부주관 입시제도 하 스카우트 관행의 위축과 회복: 1962 ~ 1963년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이전까지 대학별로 치러지던 입시가 정부주관 국가고사 체제로 전환됐다. 첫해였던 62학년도에는 지원자들이 먼저 대학 및 학과를 선택해 지원한 후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사를 치렀고, 국가고사 합격자에 한해 대학별로 국가고사 성적, 면접, 신체검사, 실기시험 등을 통해 학생을 선발했다(강태중 외, 2013). 국가적 차원의 입시정책 출현은 이전까지 대학이 자율적으로 행하던 우수선수의 스카우트 관행에 장애로 작용했다. 운동선수일지라도 국가고사에 합격해야 대학입학의 기회를 부여하는 정부 입시제도는 기존 진학특전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정책의 무풍지대에서 대학이 추구하던 이해, 그러니까 스카우트 관행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경향신문, 1962.01.13.).


이는 대한체육회를 위시한 체육계 또는 경기인들의 이해(interests)가 최초로 발기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제도변경과 관련한 한 좌담회를 엿보면, 우수선수의 진학 특례 폐지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체육계 인사들의 목소리를 청취할 수 있다.

정상윤(체육평론가): 학제변경으로 유능한 선수의 진학이 다소지장이 된 것 만은 사실이다...... 현재 학원스포츠는 겨우 육이오이후 위축상태를 벗어나서 전진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다시 줄어들게 되는 형편 아닌가 걱정된다...... 사고의 원인은 체육을 교육의 일환으로 취급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본다(동아일보, 1962.01.05).

이효(대한체육회 부회장): 진학제도의 변경으로 우수선수를 체육회서 엄선 추천한 자에 대한 특별조치 및 장학제도를 조속 추진해야한다 ...... 우수 선수들의 직장알선 및 진학문제를 해결시킴으로서 훈련에 전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동아일보, 1962.01.05.).

대한체육회는 문교부에 우수선수 500여 명에 대한 대입 특별고려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부는 대신 실업팀 입단을 제안하였다(동아일보, 1962.01.26.). 결국 62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대한체육회가 파악한 대학진학 희망 운동선수 409명 중 국가고사에 합격한 인원은 98명에 불과했고, 고등학교 입학 희망 운동선수들 가운데서도 98명이 탈락하는 진학대란이 발생했다(경향신문, 1962.02.10.). 기존의 임의 스카우트 관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전면으로 부상했던 체육계의 이해(interests)는 적어도 1962년 국가 입시정책이라는 상위 제도의 틀 내로는 흡수되지 못했다.


그러나 62학년도 국가고사에서 운동선수들이 대거 탈락한 이후, 체육계는 줄기차게 체육특기자 특례입학을 허용해야 한다는 진정을 이어갔다. 특히 대한체육회는 언론지상에서 특기자제도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특례가 필요한 종목과 우수선수의 규모를 파악, 추천하였고, 문교부와 정부고위층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동아일보, 1962.01.26.). 당시 신문에 소개된 체육특기자 대학 특례입학의 필요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체육특기자제도 없이는 학원스포츠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 둘째, 특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률적인 획일주의 교육이다.

  • 셋째, 선수들이나 학부형들이 운동을 피하는 경향이 현저해질 것이다.

  • 넷째 많은 돈을 들여 운영해오던 대학스포츠팀이 신입생을 받지 못해 맥이 끊길 수밖에 없다.

  • 다섯째, 국제무대에서의 스포츠 경쟁력이 필연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섯째, 아주대회(아시안게임)와 오륜대회(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라면 적어도 대학 교육을 받아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 (경향신문, 1962.02.10.; 경향신문 1962.04.25.; 동아일보, 1962.01.26.).

더구나 62학년도 입시가 여러 문제들을 노출하면서,8) 이듬해인 63학년도에 입시제도가 재차 수정된 것은 이러한 체육계의 이해(interests)가 보다 폭발적으로 재결집, 재점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변화의 틈새에서 대한체육회가 문교부를 설득함으로써 62년 10월 체육특기자에 대한 (국가고사) 무시험 서류 전형을 골자로 하는 ‘고교․대학 특기자서류전형요강’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명실상부한 최초의 정부 공인 특기자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 각 대학별로 이루어졌던 체육특기생에 대한 특례가 국가의 주관 아래, 요강에 명시된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 ‘체육특기자 서류전형 요강’의 조건을 충족한 특기자들은 국가고사나 각 대학 본고사 없이 서류검토만으로 면접 또는 실기검사를 거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일제시기 전문학교 운동부 때에도 ‘운동선수 만능시대인 느낌을 주어 선수 아닌 동무들의 부러움과 비웃음을 아울러 받고’있다고 우려되던 스카우트 관행이 교육당국에 의해 공식 제도화된 것이다. 1962년 10월 문교부에서 발표한 ‘63학년도 각급학교 입시요강’ 가운데 ‘고교․대학 특기자서류전형요강’의 체육특기자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등학교>
① 개인경기는 특별시 또는 도 이상을 단위로 한 공인된 대회에서 각 종목에서 1등을 한자.
② 단체경기는 특별시 또는 도 이상을 단위로 한 공인된 대회의 실적을 토대로 하여 준결승전까지 진출한 팀의 정선수 중에서 특별시 또는 도별로 한 팀 선수 수와 동일 수 이내의 범위에서 각 경기 연맹이 추천하는 자. (예 야구 9명 이내, 농구 5명 이내)
③ ①②에서 말하는 대회는 대한체육회 주최 전국체육대회 또는 동지방예선, 대한체육회산하 각종 경기연맹이 주최하는 전국선수권대회 또는 각도체육회 산하 단체에서 주최하는 특별시 및 도별의 지방선수권대회이어야 한다.
<대학교>
① 개인경기는 특별시 또는 도 이상을 단위로 한 공인된 대회에서 각 종목에서 1등을 한자.
② 단체경기는 특별시 또는 도 이상을 단위로 한 공인된 대회의 실적을 토대로 하여 준결승전까지 진출한 팀의 정선수 중에서 특별시 또는 도별로한 팀 선수수와 동일 수 이내의 범위에서 각 경기연맹이 추천하는 자. (예 야구 9명 이내, 농구 5명 이내)
③ ①②에서 말하는 대회는 대한체육회 주최 전국체육대회 또는 대한체육회 산하 각종 경기연맹이 주최하는 전국선수권대회이어야 한다.
<기타>
본 요강의 적용범위는 대학에 있어서는 음악, 미술 및 체육 모두 동계학과에 지원하는 자에 한하며, 고등학교에서는 동계의 인문학교에 지원하는 자에 한하여 적용한다. 서류전형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자하는 대학교 또는 고등학교는 사전에 공고하여야 한다. 본 요강의 모집인원은 그 학교의 모집정원에 포함된다(조선일보, 1962.10.14.)

그러나 체육계의 입장에서 문교부가 내놓은 체육특기자 입학전형은 그 규모와 방식에서 모두 문제가 있었다. 먼저 대학에 할당된 체육특기자의 숫자는 이전의 선수수급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대한체육회는 21개 종목 약 500명을 추천했지만 문교부는 체육특기자의 수용 범위를 248명으로 한정했다(경향신문, 1962.11.16.; 경향신문, 1962.11.21.).


또한 상기 기사의 <기타>에 명시된 ‘동계학과(동일계열학과, 즉 체육계열 학과)’로 체육특기생의 입학을 제한한다는 내용은 당시 체육계열 학과를 보유했던 경희, 중앙, 이화, 조선, 경북, 공주사대, 수도여자사대 등 7개 대학에 우수선수 확대 유치의 기회를 허락하는 반면, 많은 운동부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체육계열 학과가 없던 ‘고려대’와 ‘연세대’의 이해를 침해하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62.11.02.). 동일계열 입학제한에 따라 체육특기자를 수급할 수 없게 된 고려대와 연세대는 당시 체육계의 중심세력이었던 동문들(고우체육회, 연우체육회)과 합세해 문교부에 동일계열 입학에 대해 항의하였다(동아일보, 1962.11.16.).


결국 문교부는 체육특기자들이 문교부에 제출한 서류전형원서를 각 대학을 통해 돌려주는 해프닝을 벌이면서까지 일정을 늦췄고(경향신문, 1962.12.14.), 체육특기자들이 타계(체육계열 이외)에 자유롭게 진학할 수 있도록 ‘동계대학 제한’을 ‘자유선택’으로 변경하였다(경향신문, 1962.12.15.). 그 결과 63학년도 체육특기자 서류전형은 고려대와 연세대를 포함해 1차 합격자 240명, 추가 15명 등 총 255명의 체육특기자를 선발했다(경향신문, 1963.01.26.). 규모는 늘어나지 않았지만 운동선수를 스카우트하던 모든 학교가 바뀐 국가중심 입시제도 아래서 비교적 공정하게 기존의 관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63년도에 마련된 체육특기생에 대한 입학특례는 특기자제도의 형성이 국가가 주도하고 대학이나 체육계가 따르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체육특기자 입학특례는 대학과 경기인들에 의해 이미 관행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이들 민간의 이해당사자들은 국가주도 입시체제 도입에 의해 이러한 행태가 불가능하게 된 국면에서도 세력을 규합하고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고사성적을 입학사정에 반영하려던 정부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대학 간 선수수급 경쟁의 유불리를 고려해 동일계 진학 제한을 철회한 장면은 대학과 대학에 관계된 경기인들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실효성 있는 형태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들의 이해는 63학년도 대학입시에서 국가고사가 폐지되고 다시 대학별고사가 시행되면서 스카우트 전쟁의 형식으로 본격화된다.

62년 대학입시가 국가고시로 치뤄지면서 스카우트 관행에 제동이 걸리자 63년부터는 무시험 입학 전형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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