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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폭력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

지난 동계올림픽을 3주 앞두고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에서 폭행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해당 사건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코치 A가 선수 B에게 상습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대통령이 진천선수촌을 격려 방문했던 전날도 태도를 문제 삼아 밀폐된 공간에서 발과 주먹으로 수십 차례 폭행하였다.”고 했다. 또한 “피해 선수는 심한 폭행에 따른 공포 때문에 선수촌을 빠져나갔고, 지도자 3인은 폭행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몸살감기로 병원에 갔다고 허위 보고하였다."라는 충격적 결과였다.

스포츠계의 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있다. “메달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주의, 승리지상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금메달을 따야 국위선양을 하고, 이겨야만 보상을 받기 때문에, 스포츠계는 승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폭력과 같은 인권유린도 자행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여기에 협회도 추가되었다. 스포츠계의 폭력은 "나쁜 사람들만 가득한 협회"의 문제이다.


나는 스포츠계 폭력을 국가주의, 승리지상주의, 썩어 문드러진 협회의 탓으로 돌리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귀에는 그 비판들이 이게 다 박정희 때문이고, 전두환 때문이며, 전명규 때문이란 ‘남 탓’하는 소리로 들린다. 사회의 어느 부문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츠 폭력은 스포츠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포츠에서 폭력이 유효하다면 우리 사회가 폭력을 동원해도 용인하기 때문이다. 특정 사회의 폭력의 존재는 누군가에게 남 탓 하듯 원인을 물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스포츠계의 폭력이 왜! 여전히 일어나는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출처: TV조선 뉴스 화면 캡쳐

한국 사회는 스포츠에서의 폭력에 유독 관대하다. 온갖 정치공작으로 축소될 위기에 처했던 세월호 사건이 잊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함께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매달린 노란 리본 때문이었다. 만연한 성폭력이 미투 운동으로 분출될 수 있었던 건 분노한 다수의 개인들이 침묵을 깨고 연대했기 때문이다. 반면 쇼트트랙 대표팀 폭행 사건은 어땠나. 사건 직후 선수촌 관리 책임자인 대한체육회는 “대표팀 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언론은 “대표팀의 전력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선수에 가해진 심각한 인권유린의 진상보다 올림픽을 먼저 걱정했다. 여자 팀 추월 경기에서 선수 간 왕따 의혹에 대해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인의 숫자는 60만 명을 넘었다. 반면 쇼트트랙 대표팀 폭행사건에 대해 처벌을 요구했던 몇 개의 청원들은 어느 것도 10명 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를 확인하면서 "운동을 하는데 좀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지 “선수를 가르치는 지도자는 때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싶어 소름이 돋았다. 승리를 위해 폭력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국가주의도 승리지상주의도 아닌, 바로 '우리'아닌가.

폭력은 권력이다. 문명화 과정을 쓴 노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근대 국가에서 폭력의 독점자는 국가이다. 누군가에게 맞으면 직접 복수하지 않고 경찰서를 찾고 법에 호소하는 이유다. 우리가 문명화된 사회를 살고 있다면, 맞아야 하는 선수도 없고, 때릴 수 있는 지도자도 없다. 그러나 폭력은 체육관, 라커룸, 숙소, 선수촌 등, 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내밀하고 은밀하게 계속된다. 법이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다. 권력의 연결망에 매몰되어 그 담장을 넘지 못한다. 나는 폭력의 실체를 담장 너머 세상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은 오직 ‘관심’과 ‘분노’라고 생각한다. 스포츠계의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관심’과 ‘분노’가 다름 아닌 폭력에 저항하는 ‘연대’이고, 이 연대야 말로 폭력을 뿌리 뽑기 위한 힘이다.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말하고, 분노하는 폭력은 그 힘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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