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제도의 역사적 기원: 보류조항의 억압적 성격과 그 계승
- 한승백

-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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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제도는 일반적으로 선수의 계약 권리를 확장한 진보적 제도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FA 제도는 구단이 선수의 계약 자유를 억압하고 독점적으로 보유했던 보류조항(Reserve Clause)에 맞선 법적·사회적 투쟁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오늘날 FA 제도는 선수의 계약 자유 보장을 공식적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상 규정, 보호선수 규정, 샐러리캡 등 다양한 하위 규정들이 구단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도록 설계되어 선수의 계약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FA 제도는 명목상 추구하는 가치와 실제 운영되는 현실 사이의 괴리, 즉 대표적인 ‘제도적 모순(institutional contradictions)’을 드러낸다.
보류조항은 1879년 미국 내셔널리그(National League)에서 각 구단이 최대 5명의 선수를 다음 시즌 계약 대상으로 ‘보류(reserve)’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면서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애초에 구단이 선수들의 임금을 통제하고 이적에 따른 과도한 연봉 인상을 방지함으로써, 구단의 경제적 이해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Eckard, 2001; Zimbalist, 1992). 이후 1880년, 미국 National League가 채택한 최초의 표준 계약서인 Uniform Player Contract에 명문화되면서 모든 선수에게 적용된다. 보류조항에 따라 구단이 선수와의 계약 여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선수의 이적과 계약 교섭권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가 가능하게 되었다(Eckard, 2001; Krautmann & Solow, 2009; Zimbalist, 1992).
보류조항이 도입된 1879년 이후 1889년까지, 선수의 연봉은 평균 6~9% 감소하였고, 이적 프리미엄은 약 70%까지 줄어드는 등, 선수의 노동비용 억제라는 구단의 경제적 목적이 명확히 달성되었다(Ashcraft & Depken, 2019). 보류조항은 이후 거의 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선수의 계약 자율성을 억압하는 핵심 기제로 기능했다(Staudohar, 2018; Zimbalist, 1992). 보류조항의 억압성은 곧 선수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법적 투쟁으로 이어졌다. 1940년대 Danny Gardella의 멕시코 리그 이적 소송과 1953년 George Toolson 소송은 모두 보류조항이 미국 반독점금지법(Antitrust Law)에 위배된다고 문제를 제기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연방법원은 MLB의 반독점 지위 예외를 인정하며 이들 소송을 기각하였다(Abrams, 2006; Staudohar, 2018).
이러한 상황에서 1969년 Curt Flood의 소송은 FA 제도 도입의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Flood는 자신의 트레이드를 ‘기본권 침해’, ‘개인의 상품화 행위’라 반발하며 보류조항의 부당성을 문제 삼았고, 이 과정에서 선수노조와 인권단체의 지지를 얻으며 보류조항에 대한 법적·사회적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Kozlowski, 2007; Epstein, 2011). Flood의 소송은 비록 법정에서 패소했지만, 이로 인해 보류조항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선수의 계약 자유 보장 요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같은 법적·사회적 움직임은 1975년 Andy Messersmith와 Dave McNally의 역사적 소송으로 연결되었다. 두 선수는 계약 만료 후 구단의 보류조항 적용을 거부하고 중재를 신청하였으며, 중재인 Peter Seitz는 계약 종료 이후에는 보류조항을 적용할 수 없고 선수에게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을 계기로 구단은 더 이상 계약 만료 선수를 무기한 보류할 수 없게 되었으며, 최초의 FA 제도가 실질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Staudohar, 2018).
한승백, 권헌수( 2025). 한국 여자 프로배구 FA제도에 내제된 구조적 통제. 한국융합과학회 14(7) 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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