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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싼 법규



골프는 상류계급의 스포츠이다. 골프의 신이 강림하여 골프에다 “상류”라고 새겨 놓은 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골프가 “상류”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비즈니스를 위해 접대라도 할라치면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모셔야 하나. 왕처럼 모셔야 한다. 그렇기 위해선 골프장에 모시고 가 ‘그와 나’만의 공간에서 라운딩을 돌며 사적인 친밀관계를 싹 틔우고, 좋은 음식을 대접한 후 룸 살롱에 모시고 가 도장을 “꽝”하고 찍어야 비로소 비즈니스가 성립한다. 그래서 비즈니스 업계에 “사장님 언제 골프 한 번 치시죠”란 말은 있어도 “사장님 언제 탁구 한판 치시죠”란 얘기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평생 축구나 차던 사람도 뭔가 로비라도 하려면 스크린 골프라도 배워야 하는 것이고, 게이트볼이나 치던 노인네도 로또가 당첨되면 왠지 그린 위를 거닐어야 신분에 걸맞을 행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상류계급이 가장 꺼리는 말이 있다면 바로 “천박함”이다. 자고로 계급이란 돈만 많다고 취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대손손 혈통으로 이어지고, 가문의 전통 속에서 뼈 속 깊이 아로새겨져야 비로소 상류 계급의 향취가 풍기는 법이다. 그런데 복권 당첨과 같이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은 졸부들은 통장이 빵빵할 수는 있겠지만 상류계급의 계급적 특성까지 단기 속성으로 체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강남의 거리에서 전통의 노블레스가 졸부와 스스로를 구별짓기 위해 던지는 대표적인 말이 바로 “저 천박하게 말이지~~~”이다. 즉 “천박”이야말로 계급적 구별짓기의 언어적 시전...... 아! 근데 진짜 귀족들은 “천박”이란 말 자체를 불경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입에 올리지조차 않는다. 천박한 꼴을 보면 튀어나오는 최대 표현은 “음! 음!” 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란 의미다.

스포츠에서도 이 같은 계급적 취향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번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에서 튀어나온 "팔꿈치 인대 나가라~~", 유럽의 축구장에서 밥 먹듯이 오가는 ‘니 딸래미 어쩌구’, ‘니 에미 저쩌구’ 등의 쓰레기 같은 언사들은 골프장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얼척 없는 얘기들이다. 골프는 에티켓, 배려, 존중과 같은 정신적 측면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 같은 매너가 골프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계급적 지위를 개런티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매너란 대대손손 이어온 좋은 가문의 전통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몸에 체화되는 것이다. 때문에 매너는 골프를 상류계급의 스포츠로 구별짓게 만드는 내재화된 성향이다. 적어도 골프를 향유하는 상류계급의 사람이라면 그 특성인 예의범절과 에티켓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하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울어 나와야 하는데, 그게 바로 골프가 다른 스포츠와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매너의 실천을 아비투스라고 불렀고, 오고 가는 매너 속에 이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상류”라는 아비투스를 강화해 간다.

그렇다면 골프를 통해 상류계급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골프 매너’, ‘골프 에티켓’ 같은 책들을 주문하면 된다. 재밌는 건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검색을 한다고 해도 에티켓과 매너를 따로 다루는 서적이 있는 스포츠는 골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골프선수 김비오가 KPGA 한 대회에서 갤러리에게 법규를 날린 사건이 있었다. 우승을 다투며 최종 라운드 티샷을 하던 상황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터졌고, 이에 화가 난 김비오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법규를 날리고, 클럽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는데 그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그리고 이 행위에 대해 한국프로골프협회는 3년간 자격정지와 벌금 1,000만 원이란 징계를 내렸다. 한국프로골프협회 양휘부 회장은 징계와 관련하여 “골프는 에티켓과 매너를 중요시 여기는 스포츠인데 이번 사태는 에티켓과 매너, 예의범절을 모두 무시했다. 우승을 다투는 순간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협회는 “선수들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라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나는 이 같은 징계에 상류계급 스포츠로서 아비투스 체계를 드러내려는 협회의 무의식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종목이라면 구두 경고나 주고 넘어갈 일 같지만, 매너를 중시하는 골프는 다르다는 계급적 감각을 보여줌으로써 골프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천박함에 대해 심판하려 했다는 것이다. 골프장을 찾는 관중이 어디 그냥 스펙테이터인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갤러리 아닌가. 그런 갤러리에게 법규를 날리는 천박함은 상류계급 스포츠와 스스로 동일시하는 한국의 골프계에선 반드시 찍어내야 하는 금기인 것이다.

문제는 골프협회는 상류계급 스포츠 골프의 아비투스 체계를 잘 지켜냈을지 모르지만 공정한 징계 수위를 내리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NBA에서 관중석에 뛰어들어 관중을 주먹으로 두들겨 팬 론 아테스트는 한 시즌이 채 안 되는 73경기의 출장정지를 받았다. 감독의 목을 졸라 끌고 다닌 스프리웰에게는 68경기의 징계가 내려졌다. 95년 자신을 비난하는 관중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던 축구의 에릭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를 당했다. 같은 골프 종목이었던 2002년 US오픈에서 한 팬을 향해 법규를 날린 세르지오 가르시아는 아무런 공식적 징계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프로골프협회는 경기 중 법규를 날린 김비오에게 이 모든 사례를 통틀어 가장 무거운 중징계를 내렸다.


징계를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징계 수위가 합리적인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골프가 매너를 중요시하는 스포츠란 사실이 감안되어야 한다면 직업인으로서 선수의 밥벌이의 숭고함도 엄연히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김비오가 셔터 소리를 낸 갤러리에게 클럽을 휘둘러 상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그저 열받는 마음에 손가락을 들어 불쾌감을 표시했을 뿐인데, 이 행동이 3년이나 선수를 필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할 만큼 그렇게 중대한 범죄란 말인가. 한국 골프는 이번 징계를 통해 골프장에서 금기시되어야 할 천박함을 박멸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상류계급 스포츠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냉철한 균형감각과 공정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미 결정이 내려졌지만 한국프로골프협회의 상벌위원회 결정이 과연 공정했는지 뒤 늦게라도 징계 수준에 대해 재심의를 벌여야 마땅할 것이다.


P.S.

지난 10월 23일 협회는 이사회를 열어 김비오의 자격정지 기간을 3년에서 1년으로 줄이고 봉사활동 120시간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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