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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세상을 떠나다.

최종 수정일: 2021년 12월 25일

60년대 분리주의가 합법이던 시절, 미국 흑인에게 인종차별은 일상이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캐시어스 클레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살던 마이애미의 식당, 쇼핑센터, 호텔, 심지어 화장실까지 ‘White Only’란 문구가 적혀있었고, 2등 시민 흑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복싱체육관은 흑인 청년들이 차별받지 않았던 몇 안 되는 공간이었고, 스스로 통제하고,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케시어스 클레이는 명코치 안젤로 던디를 만나 프로선수로 성장했다.

63~64년은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수많은 인사들이 투옥되고, 침례교 폭탄 테러로 4명의 흑인 소녀가 사망하고,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장면처럼 수만 명의 시민들이 의회에 민권법 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백인을 즐겁게 하기’, 그것은 당시 백인 지배 사회에서 흑인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다른 분야와 달리 유독 연예계와 스포츠 분야에서 흑인 유명인사가 쏟아져 나온 이유였다.


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프로로 데뷔했던 케시어스 클레이. TV 속 케시어스 클레이는 과장된 언변과 상대에 대한 직설적 도발, 때로는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개지랄을 떠는 고삐리처럼 기행을 일삼으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미국에 온 비틀즈를 찾아가 사진을 찍었고, 소니 리스턴과의 챔프전을 앞두고는 8라운드에 이기겠다고 객기를 부렸으며,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쏴라’라는 당시로서는 이상한 말을 쉴 새 없이 떠벌였다.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 아래 그는 성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광대였고, 자기 연출에 능했으며, 스스로를 홍보할 줄 아는 감각이 있는 흑인이었다.


64년 소니 리스턴을 꺾고 챔피언에 오를 때 즈음, 캐시어스 클레이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게 뭐냐, 미국에다 이슬람 독립 국가를 만든다는 급진적 종파 운동이다. 그곳에서 말콤 엑스를 만났고, “Black is beautiful”이란 얘기를 들었고, 종교적 신념을 얻었으며,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이제 캐시어스 클레이란 노예의 이름을 버린다, 이제부터 나는 무하마드 알리로 살겠다"

알리가 된 그는 더 이상 백인들이 원하는 말을 하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광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운명을 바꾼 말 한마디 ‘Why me?’, 내 생각에 그가 한 모든 말 중에 가장 위대한 말은 ‘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도 아니고 ‘Impossible is nothing’도 아니다. 그것은 ‘Why me? 아니 ~ 왜! 나야?’란 평범한 질문이다. 애초에 알리는 읽기와 쓰기 시험에서 떨어져 베트남 전쟁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징집 검사 기준이 완화되어 1-A급 자동 분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자 “나는 헤비급 챔피언이라고, 신체검사도 안 해보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라며 격분했다. 법정에서는 “나는 베트콩에게 아무 원한이 없어요. 왜 나를 비롯한 소위 흑인들이 미국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를 괴롭힌 적도 없는 무고한 자들한테 총을 쏴야 하나요. 걔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잖아요”라며 병역거부를 선포한다. "I shook up the world"라고 링 위에서 그렇게 떠들더니 이번에는 정말 그의 말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상징성을 부여받은 이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 병역을 거부하면서 병역거부가 더 이상 비겁함을 의미할 수 없게된 것이다. 이 사태로 거리에선 “그가 안 가면 우리도 안가 If he don’t go, we don’t go”란 구호가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자신한테 닥치자 내 뱉은 말 한마디로 알리는 반전 운동의 중심에 섰다. 알리는 자신이 그렇게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고있었을까.


백인들의 전쟁을 거부한 흑인에게 돌아온 대가는 가혹했다. 챔피언과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고, 3년 반이나 링 위에 오르지 못 했다. 나이로는 그의 가장 전성기의 시절이었다. 결국 대법까지 가는 투쟁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링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챔피언 전을 치르기 위해 16번이나 경기를 치러야 했고(이 과정에서 조 프레이저에게 1패를 빼고 모두 승리했다), 마침내 우리 나이 34세 때 천하무적이라 불리던 조지 포먼을 8라운드에 KO로 눕히며 두 번째 챔피언에 올랐다. 이게 그 유명한 'Rumble in the jungle'이다. 64년 소니 리스턴과의 대결 전 8라운드에 KO시키겠다고 객기를 부렸던 적이 있는데, 10년 후 조지 포먼을 겨냥한 예언이었을까. 이후 리온 스핑크스와의 두번의 대결에서 졌다가 다시 이기며 세 번째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통산 56승 5패의 성적을 남기고 80년 은퇴한다.


나는 60년대에는 태어나지 못했고, 70년대 말에서야 기껏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에 알리의 시대를 살지 않았다. 래리 홈즈에게 챔피언을 빼앗겼을 때는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몇 년 전 알리에 대한 짧을 글을 썼었고, EIDF에서 방영했던 “무하마드 알리되기(Becoming Ali)”를 50번 정도 봤다. 예전에 알리 티셔츠도 샀었고, 그의 사진도 모았었고, 그에 대한 추억이 많은 편이다. 그런 그가 며칠 전 저세상으로 갔다. 알츠하이머를 오래 앓았기 때문에 가끔 알리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곤 했는데,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는 생전에 “I am the greatest”라고 수 없이 얘기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금 많은 이들이 그가 정말 위대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처음부터 "위대함"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을까. 그는 복싱만 잘했지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상대를 조롱하고, 천박한 말들도 수없이 내뱉고, 읽기 쓰기도 잘 못하고, 징집을 당할 때 까지 병역거부의 신념은 커녕 베트남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그의 말이 세상에 그 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도 몰랐던 말하자면 위대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 인식을 갖게 되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고,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그의 삶이야 말로 위대함이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가 아닌가. 30대 중반에 조지 포먼을 꺾고 “Rumble in the jungle에서 승리했을 때, 세상은 가장 위대한 복서의 반열에 그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포츠를 넘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부당한 처사에 대해 주저함 없이 솔직하게 내뱉은 그 한 마디 “Why Me?”란 질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존경과 애도를 표한다.


2016년 6월 17일

https://blog.naver.com/yakolars/220729464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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