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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최종 수정일: 9월 21일

초등학교 때 핸드볼 선수 생활을 했다. 친구들이 학교로 등교할 때 버스를 타고 체육관으로 갔다. 체육관엔 폭력이 난무했다. 코치가 부르면 달려가 열중쉬어 자세로 귀싸대기를 맞았다. 구르라면 굴렀고 엎드리라면 엎드려 하루에도 수차례 빠따를 맞았다. 추운 겨울 춘천 농고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 경찰진압봉으로 맞았을 때 그 처량하고 비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구타는 일상이었다. 맞기 싫어 뛰었고, 무서워서 달렸다. 때리는 게 잘못이란 도덕적 자의식이 형성되기 전이라 매가 무섭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없었다. 체육관을 같이 사용했던 모든 팀의 코치들은 많이 때릴수록 더 좋은 성적이 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폭력은 경쟁이 되었고, 가장 손쉬운 지도법이었다. 경기를 할 때면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 끌려가 언제나 매타작이 있었는데 이기고 있어도 “혹시 모르니 몇 대씩 맞자”라고 했다. 폭력은 부적이기도 했다. 그렇게 맞으면서 똥물 나게 뛰는 게 당여하다고 생각했다.


재수까지 해서 체육학과에 들어갔다. 입학하고 이튿날부터는 체육관에 모여 츄리닝을 입고 뺑뺑이를 돌았다. 오후 4시면 모였고, 한 달 정도 두세 시간 씩 군기교육을 받고 선배들에게 신고식을 올렸다. 대가리를 하도 박아서 두피에서 비듬처럼 피딱지가 떨어져 나왔다. 폭력이 난무하는 체육관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같은 어처구니 없는 구호를 외치며 여기서 배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란 걸 금방 깨달았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폭력을 선배들은 마치 대단한 전통이라도 되는 양 정당화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현장을 학과 교수 누구도 제지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폭력의 뿌리가 결국 교수들 이란 걸 알게되었다. 호랑이를 개라고 가르쳐도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 교수의 권위를 만들기 위해 체육학과 교수들은 대학에 군기란 전통을 만들었다.


폭력의 목적은 억압, 통제, 그리고 지배이다. 단순한 신체적 가해가 아니라 억압하고, 통제해서 결국 지배하기 위한 훈육(discipline)의 테크닉이다. 지배를 당하니 맞아도 그 부당함을 쉽게 말하지 못하고, 폭력을 포함한 위계적 권력 관계가 내면화 된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이게 전통이야” 같은 수사로 포장하고, 줘 패도 아무 소리 못하게 만드는 것 만큼 손쉬운 지배 방법이 어디있겠나.

최근 지방의 한 고교 레슬링 지도자가 전국대회 현장에서 경기가 끝나자마자 제자를 머리와 목덜미, 가슴 부위까지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지도자들이 여전히 ‘폭력’을 코칭의 방법으로 착각하는 이유를 ‘폐쇄성‘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폐쇄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폭력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여전히 인맥과 지자체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비인기 종목들, 레슬링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까지 잔존하는 스포츠계의 폭력은 다름 아닌 폐쇄적 권력의 증거이다. 그것을 어떻게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구조로 전환할 것인가. 앞으로 체육계 뿐 아니라 한국 사회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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